비운의 백제 31대 왕이자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의자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순느 없습니다. 다만 약 35살 전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의자왕으로 등극한 때는 약 42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의자왕은 해동 증자로 불리웠는데 증자는 공자님의 제자입니다. 아버지 증점 또한 공자님의 제자입니다. 하루는 증자가 잘못을 하여 아버지가 심하게 때립니다. 그런데 증자는 아버지가 때리는 무지막지한 매를 피하지 않고 온몸 그대로 전부 맞았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채 아들 증자를 심하게 매질한 후 술이 깨서 증자를 보니 아들의 몰골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하지만 증자는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하며 공자님이 알려준 피리 연주를 합니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효심이 깊었던 증자의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효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자님은 나중에 증자를 나무랍니다. 만일 네가 그렇게 두들겨 맞다가 혹시라도 죽으면 술에서 깬 아버지가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아버지가 때린다고 그걸 곧이 곧대로 다 두들겨 맞는게 효가 아니다. 라고 공자님이 증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와 싸울 수도 없고 어떻게 하란 말인지 물어보니 당연히 도망가야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술이 깨면 그때 용서를 빌면 되지 않겠느냐하고 증자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아버지께 절대 복종한 증자처럼 의자왕도 효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성충, 계백 등의 지략과 용맹함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나갑니다. 신라에는 김유신이 있다면 백제에는 성충과 계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견되는 인물입니다. 조선상고사에서 성충은 뛰어난 전략가라고 소개합니다. 예족이 백제를 침입했을 시 성충은 예족을 뛰어난 병법으로 예족을 물리칩니다. 성충에게 계속 패하자 예족 장수가 사신을 보냅니다. 그리고 비록 적이지만 나라를 위해 고생하는 너희들에게 귀한 음식을 주겠다고 하며 상자를 내밉니다. 군사들은 좋다고 하며 상자를 열려고 하였으나 성충은 열지 말고 불에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나중에 상자를 보니 그곳에는 쏘이면 엄청 고통받는 말벌들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예족 장수가 다시 상자를 보냅니다. 백제 군사들은 이놈들이 또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며 불에 태우려고 합니다. 성충은 그때 태우지 말고 열어보라고 합니다.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화약과 염초가 들어있었습니다. 불에 넣었다면 폭발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또 예족장수가 상자를 보내빈다. 그래서 군사들은 상자를 열어보고 무엇이 있나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때 성충은 열지말고 톱질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톱질을 하니 피가 나옵니다. 상자안에는 예족의 자객들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냥 열었다면 성충이 자객에게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실화라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성충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 수는 있습니다. 이런 활약상으로 의자왕은 성충을 총애합니다. 그리고 군사적인 충고를 구합니다. 성충은 김춘추가 곧 백제로 쳐들어 올것이라고 예상을 하며 대야성을 쳐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말대로 대야성을 점령하고 대야성주 김품석(김춘추 사위)을 죽입니다. 이에 김춘추는 비통한 나머지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궁인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고 적혀 있습니다. 의자왕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의자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궁인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이 의롭고 자애로웠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어 집니다. 또 삼천궁녀들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도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당나라의 역사서를 보면 백제 멸망 당시 사비의 인구는 약 5만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성비를 일대일이라고 가정하면 여성은 2만 5천명이 되겠습니다. 이 가운데 어린 여자아이와 노인들을 빼면 약 1만 5천명이 남습니다. 그런데 3천 궁녀라고 하면 성인 여성의 20퍼센트가 궁녀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진실인지 의문입니다. 또 부소산성에 올라보면 그리 넓지 않은 궁궐터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곳에 궁녀들만 3천명 살기가 비좁은데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백제보다 훨씬 강했던 조선 후기 궁녀 수도 5~600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백제 삼천궁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지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에 구중회 공주대 교수는 삼천궁녀란 과거 일부 문인들이 사용하던 감성적 표현이며 망국의 비애를 담은 시어 즉 문학적인 상징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삼천궁녀를 마치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마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대중 가요속에 삼천 궁녀라는 노랫말이 등장합니다. 확실한 역사적 근거도 없는 삼천궁녀가 대중가요를 통해 전달된 것입니다. 노래를 통해 가짜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우리들의 마음속에 정착된 것입니다. 이렇게 식민사관이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멸망을 당시의 정세 속에서 살피지 않고 의자왕이 방탕스런 생활에서 찾으려는 일본의 간교한 계략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이제는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의자왕이 방탕스런 왕이 아니라 의롭고 자애로운 왕으로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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