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일본 민심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여 뭔가 이벤트 행사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여 마치 조선이 일본에게 예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조선대로 일본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일본은 일본대로 임진왜란의 복수로 조선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더욱 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하여 일본 민심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의 대참사로 일본과는 교류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교류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여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슬슬 힘을 키우고 있던 때라 조선은 일본에 끌려간 임진왜란 전쟁 포로들을 데려와 민심도 안정시켜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선조는 1604년 사명대사에게 일본을 탐색하라고 <탐적사> 보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서 담판을 지어 사명대사는 1400여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1607년 <회답겸쇄환사>라고 불린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습니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회답하고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송환을 주된 업무로 한다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한 것은 1636년 인조 때 네번째 사절단이 파견된 무렵부터 였습니다. 이렇게 파견된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두 차례가 되었고 조선은 선진 문물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파견 인물로는 정사, 부사, 종사관, 통역관, 문서기록관, 의원, 화원, 마상재인(서커스), 악공 등 수많은 사절단을 구성하여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의 훌륭한 문화를 그들에게 보여주어 다시는 조선을 깔보지 않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그 시절에 통신사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6개월이 걸리는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일본을 깔보며 왜놈이라고 불렀으며, 교통 불편, 말이 통하지 않는 어려움 등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훌륭한 문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우월감(?),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등도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특히 열광한 것은 마상재인들의 승마기예였습니다. 말하자면 원조 한류 스타라고 볼 수 있겠다. 말을 타며 기묘한 재주를 부리는 조선의 마상재인들의 묘기에 일본인들은 넋을 잃고 감탄하며 열광한 것입니다. 그래서 1635년 이후로 일본에 파견할 때는 꼭 마상재인들이 따라가 마상 묘기를 선보였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본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문화적 자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륙의 정세도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이 다소 형식적으로 되다가 급기야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1811년 이후 통신사는 막을 내리고 맙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무사정권이 무너지고 천황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정한론이 대두되어 야금야금 조선을 침략해오는 파렴치한 일이 벌어집니다. 200여년간 통신사를 파견하며 양국의 우의를 다졌던 노력은 조선 후기 일본의 침략으로 허물어집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세자의 죽음  (0) 2018.05.06
무수리 아들인 영조 왕위에 오르다  (0) 2018.05.06
조선 통신사  (0) 2018.05.02
환향녀의 비애  (0) 2018.04.28
인조 삼전도의 굴욕  (0) 2018.04.23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과 명나라 사람들  (0) 2018.04.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