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882년,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던 구식군인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급료를 준다고 모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급료를 받은 구식군인들은 쌀을 보고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선혜청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지키는 사람)의 농간으로 쌀의 양도 턱없이 적고, 그나마 모래가 잔뜩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한 구식군인들은 선혜청 고지기에 몰매를 가했습니다. 민겸호는 당시 선혜청 당상으로 구식군대의 폭동 주모자를 찾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구식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대접이 좋지 않게 된 것은 민씨일파의 개화정책 추진이라고 생각한 구식군인들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민씨 관리들을 죽이고 민겸호도 죽였습니다. 신식군대 별기군의 훈련교관 호리모토도 죽이고 일본 순사들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배후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왕비 민씨를 죽이려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왕비의 옷을 벗고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난을 피해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지요.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워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재집권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민씨 일파는 재빠르게 청나라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국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은 대원군을 제거하고, 임오군란을 평정하며, 조선의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 개입에 나선 것입니다.


 광동수사세족 오장경은 북양함대 군함 4척에 경군 3000명을 동원하여 덩저우를 출발하여 조선 남양만 마산포에 상륙합니다. 남양만 마산포는 현재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입니다. 그리고 한양에 입성하여 오장경과 원세개는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납니다. 그리고 청나라 진지로 답방하여 현재 조선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소수의 병력을 대동하고 남대문 밖에 있던 청나라 진지에 답방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청나라가 조선의 현실 문제에 대해 중재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주모자로 몰아 남양만으로 압송합니다. 재집권한지 33일만의 일입니다.

 남양만에서 청군 군함 등영주함에 실려 텐진으로 압송됩니다. 더 기막힌 것은 청군에 끌려간 대원군이 죄인취급 당하며 북양대신 이홍장의 국문을 받는 것입니다. 일국을 호령했던 대원군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홍장의 국문에 비굴하지 않았던 대원군에게 영원한 귀국 불가의 판결이 내려지고 바오딩 행정관청인 구 청하도서에 구금당합니다. 지금은 이곳이 헐리고 없지만 신 청하도서에서 대원군의 억류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감시병이 상주하고, 편지도 검열당하며, 외부인과 면담은 불가했습니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며 분노를 다스리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것은 신 청하도서의 안내문입니다. 현재 보수공사 중인데 안내문에는 "대원군이 패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왔다."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중국이 강제로 납치해 놓고서 도움을 줘서 중국으로 왔다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오장경과 그의 휘하였던 원세개는 조선에서 위압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고종은 오장경 일행이 청으로 돌아간 후 반청의 태도를 취합니다. 친러 정책이지요. 이에 청나라는 고종과 민씨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슬그머니 석방하여 조선으로 돌려 보냅니다. 원세개가 호위하였고 피랍된 지 3년 2개월만입니다. 운현궁으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이로당에서 칩거에 들어갑니다.

서월철폐, 경복궁 중건, 여러 정책들의 쇄신, 시대를 읽지 못한 쇄국정책 등을 추진한 대원군은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원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인 미우라에게 이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또 다시 권력을 잡는 듯 하였으나 친러파에 의해 바로 축출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98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힘없는 나라였기에 일국의 대원군이 납치당하고, 그들의 철저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이 참 슬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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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구식군대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13개월이나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구식군대에게 한달치의 봉급미를 준다고 하여 선혜청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양도 부족하고, 더군다나 모래가 섞여 있는 봉급미를 보고 격분한 구식군인들은  1882년 6월 9일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다 민씨 일족 때문이라고 생각한 구식군대들은 민씨 일족과 별기군 일본 교련관 호리모토도 죽이고 일본 순사 등 일인 13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다급한 명성황후는 궁녀 복장으로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였고, 이 난국을 타개할 사람은 대원군밖에 없다고 생각한 고종은 대원군에게 반란을 수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민씨 일파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약 4,5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묄렌도르프와 위안스카이가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당했으며, 일본은 주모자 처벌과 배상을 하라는 위협을 하여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영효는 영국 공사 파크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청은 조선의 국내외 모든 일들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나는 청의 이러한 불의한 행동에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은 개화를 하여 나라의 힘을 키우자는 생각을 합니다. 조선의 개화파는 이 과정에서 청에 대한 태도와 개화의 범위와 속도 차이에 따라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온건개화파는 청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민씨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일본식 개화를 모델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를 빨리 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세력은 조선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김옥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관 도입은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위축됩니다. 급진개화파는 그 동안 추진해오던 개화 정책이 모두 후퇴할 위기에 처하자 급진개화파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거사를 도모합니다.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를 안심시킵니다. 더욱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정변이 나면 김옥균을 보호할 방침이며 청국의 현재 병력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 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굳게 믿은 급진개화파는 일본 군대를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 정부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민씨 일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변을 감행합니다. 사대당 요인을 연회에 초청하여 암살하려고 했으나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자 급진개화파는 고종에게 거짓 보고를 올려 고종의 거처를 경우궁으로 강제로 이어하게 합니다. 경우궁은 조선 후기 23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이며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입니다. 경우궁으로 이어한 후 사대당 일행을 입시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입시 명령을 받고 궁에 들어서는 사대당 사람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정변은 성공하게 됩니다. 다음 날인 12월 5일 급진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합니다. 그 다음날 6일에는 14개조 개혁 정강을 마련하여 국정 혁신을 모색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 갑신정변의 최우선과제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청에에 잡혀있다는 것은 자주독립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므로 대원군 귀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겠다는 것. 그래서 규장각을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당시 규장각은 학문 연구보다는 지배층 자제들이 입학하여 그들이 다시 관리가 되는 지배계층의 세습화가 되어 이런 폐단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 땅에 세금 매기는 법을 개정, 간사한 관리 근절, 간리들이 중간에서 세금을 착복하지 못하게 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겠다는 뜻입니다.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 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민씨 일족 가까이에 있는 내시들을 없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능을 우선적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 환상미는 빌려 쓴 쌀을 의미하는데 요즘의 농가부채를 말합니다. 이런 농가부채를 탕감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세도 가문의 자제들이 입학하여 관리가 되는 세습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 정변 후 사회 시국 안정을 목적으로 일본식 순사를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예전에 보부상이 강화도에서 군량미 운반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대원군도 보부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보부청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부청이 혜상공국으로 바뀝니다. 이들에게 각종 특혜가 있었으므로 상업적인 면에서 특정 단체가 상권을 독점하면 상업 발전에 방해가 되고 특히 보부상들이 민씨들과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의 특별 사면시키며 민심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 4영보다는 1영으로 해야 관리가 쉽고 , 근위대는 경계의 목적보다는 감시의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 재정을 일원화 하여 아무리 왕이나 왕비라 할지라고 돈을 쓰고 싶으면 호조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의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호조는 김옥균이 맡게 됩니다.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13,14조는 입헌군주제와 같이 고관회의를 통해 심의 처리하겠다는 것이고 일본처럼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 개혁정강 14개조를 발표한 6일 오후에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국 위안스카이의 군대 1,500여 명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철썩같이 약속했던 다케조에 공사는 일본군을 퇴각시켜 버리고 맙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살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됩니다. 이를 보고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어쩌다 조선 최고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서 그처럼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참으로 애석하다. 어찌 일본인이 조선의 운명을 위해 노력을 다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사상은 갑오개혁과 독립 협회 활동으로 계승되어 조선의 개화사상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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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 왕위에 있을 때 조정은 안동김씨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왕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살다가 엉겁결에 왕이 된 사람인데 정치에 뭔 뜻이 있겠습니까? 왕은 허수아비이고 안동김씨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고달팠지요. 이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흥선대원군입니다. 왕도 아니면서 왕보다 더한 권력을 10년동안 누리며 조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철종임금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후사가 없습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와 결탁하여 매우 재빠르게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혹시 모를 안동김씨들의 왕위 계승에 대한 간섭을 피하려고 매우 민첩하게 왕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로 오른 사람이 고종인데 그때 나이가 불과 12살이었습니다. 왕의 나이가 어리면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럼 누가 해야 할까요? 당연히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이렇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그는 장장 10년간 조선을 다스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모든 권력을 틀어쥐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안동김씨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유교 공부는 멀리한 채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만 축내던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해 버렸습니다. 호포제를 실시하여 그동안 세금한푼 내지 않았던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하였으며 복장 또한 간소하게 하여 사치를 억제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불타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하였으며,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일절 불허하였습니다. 쇄국정책의 의지를 다지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중에서 호포제는 그동안 상민에게 부과되던 세금을 양반에까지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일반 백성들의 세부담을 줄여 주었습니다. 이당시 양반 계층이 상민계층보다도 많아져서 상민만 세금 걷어서는 부족한 재정을 메꿀 수 없었고, 양반만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 것도 있고, 경복궁 중건 같이 백성들의 원성을 받았던 정책도 있었습니다.

  이제 고종이 장가를 가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 감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고아였던 민자영을 간택합니다. 외척이 전면에 나서서 또 다시 나라가 혼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권세있는 가문의 딸보다는 왕비될 사람의 집안이 평범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민자영이 왕비가 되면 더 이상 외척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판단은 대원군에게 크나큰 실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아버지 대원군과 민 왕후는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조선의 국모가 된 민 왕후는 조정 일에 깊숙히 개입하였던 것입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은 민 왕후의 부추김에 힘입은 고종이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옵니다. 민 왕후는 자신의 친척들을 정치 일선에 불러들여 조정은 민씨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임오군란이라고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대가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민 왕후는 우대하였고, 구식 군인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구식 군대들은 대원군을 끌어 들어 난을 일으켰고, 흥선대원군은 이를 기회로 민 왕후를 축출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 왕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마자 충주로 잽싸게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리하여 청나라 군사 3천명이 한양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청나라가 들어오자 곧바로 구식군대 군인들은 진압이 됩니다. 청나라의 보호 속에 민 왕후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고,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의 우두머리로지목이 되어 청나라로 끌려갑니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과 민 왕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가 아닌 원수 사이로 변합니다. 

 시간은 흘러 동학농민운동으로 야기된 청일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게 1894년에 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청나라가 일본 군대에게 패하고 맙니다. 이제 조선은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게 싫었던 민 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항하려고 합니다. 다급해진 일본은 민 왕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1895년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에 난입한 일본 깡패들이 명성황후(민 왕후)를 죽입니다. 조선의 경복궁에서 일본 깡패들이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를 죽이는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본 놈들은 이 작전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민 왕후가 여우처럼 꾀가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작전에 흥선대원군도 개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며느리 민 왕후가 너무 미운 나머지 일본 깡패들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지요. 이때 고종은 왕비도 죽이는 무자비한 일본이 자신에게도 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이게 아관파천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공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만약 흥선대원군이라면 어떻게 며느리와 사이 좋게 잘 지낼 수 있을까? 또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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