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등에 7개의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는 의미로 안응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커가면서 무술에 열중하여 사격을 잘했습니다. 

그렇지만 교육과 민족계몽운동에 주로 힘을 쏟았습니다.

1909년초 안중근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합니다.

그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마디를 끊으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찍은 손도장에 네 번째 손가락이 짧게 나타납니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 활동 반경을 넓힙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군을 이끌며 관군에 쫓기는 김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조마리아, 동생들과 친척들까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집안 정보는 현재 별로 없는 편입니다.

독립군 활동을 하며 일본을 포로로 잡으면 다시 놔주고, 놔준 일본인이 다시 독립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사람들은 안중근으로부터 떠나갑니다.

그러던 차에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온다는 소식에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은 거사를 계획합니다.

거사를 함께 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 전 정류장에서 대기하지만 실패하고

하얼빈역에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코레아 우레"를 외치다가 담담하게 붙잡혀 갑니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고 맙니다.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은 카톨릭 세례명인 토마스를 한자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그는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다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은 고해성사를 요청했으나

교구장에게 거절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 고해 성사를 받아들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안중근에게 2011년 천주교는 살인을 했지만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또 한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장한 아들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이후 그의 장남은 일제에 의해 독살을 당합니다.

일본은 대중 기만술책으로 차남 안중생에게 일본에 공개 사죄하도록 합니다.

김구는 일본에 공개사죄하는 안준생을 죽일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일제의 압박에 의해서 꾸며진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순국하면 조선 땅에 묻어 달라는 안중근이었지만 현재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유해는 반드시 찾아 우리나라 땅에 묻어주어야 할 우리들의 당면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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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합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앞장선 일본의 이토히로부미

그를 1대 통감으로 조선에 파견시킵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도 해산시킵니다.

이렇게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원흉 이토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내립니다. 

그때 이토의 앞에 서서 그를 저격하고 외친 말

꼬레아 우라 - 대한민국 만세


이토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되어 러시아 법정이 아닌 일본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첫 공판 후 내려진 판결은

<안중근!!! 사형>

사형이 내려지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말합니다.

안중근: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늦추어 줄 수 있는가? 꼭 완성하고 싶은 책이 있다.

일본놈: 어찌 한달뿐이겠는가?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할 것이니 걱정 말라.

시간을 약속 받은 청년 안중근은 항소도 포기한 채 책을 열심히 씁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이제 막 서문과 첫 장을 마친 어느 날

안중근은 일본의 예정되었던 날짜에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날이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였습니다.

그러다가 69년 지난 일본의 국회도서관 자료실의 

수많은 책 더미 속에서 발견된 안중근의 미완성 저서 동양평화론

-수백년 동안 유럽 열강을 이끈 것은 도덕을 상실한 마음이다.

-귀중한 생명들이 무수히 희생되니 이들의 시체로 피바다를 이루는 날들이 끊이지 않는다.

-서양이 동양을 침탈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힘을 다해 방어하는 것이 제일가는 방법이다.


재판 시 판사가 물었던 말이 있습니다.

판사: 피고가 마음에 품고 있다는 정책은 무엇인가?

안중근: 일본은 야심을 버리고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해야 한다. 

          아시아 공동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해 상호 신뢰를 쌓아야 한다.

          강건한 청년을 모집하여 군단을 조성하고 서로의 언어를 배워 각국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

100여년전에 유럽 연합과 같은 공동체를 구상했던 안중근의 생각이 놀랍기만 합니다.

미완으로 남은 동양평화론에는 어떤 내용을 쓰고자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미완으로 남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큽니다.

지금 어디 어느 땅에서 쉬고 계시는지 시신조차 찾지 못해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안중근 의사...

그의 애국심과 평화정신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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