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이 왕위에 있을 때 조정은 안동김씨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왕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살다가 엉겁결에 왕이 된 사람인데 정치에 뭔 뜻이 있겠습니까? 왕은 허수아비이고 안동김씨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고달팠지요. 이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흥선대원군입니다. 왕도 아니면서 왕보다 더한 권력을 10년동안 누리며 조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철종임금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후사가 없습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와 결탁하여 매우 재빠르게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혹시 모를 안동김씨들의 왕위 계승에 대한 간섭을 피하려고 매우 민첩하게 왕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로 오른 사람이 고종인데 그때 나이가 불과 12살이었습니다. 왕의 나이가 어리면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럼 누가 해야 할까요? 당연히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이렇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그는 장장 10년간 조선을 다스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모든 권력을 틀어쥐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안동김씨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유교 공부는 멀리한 채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만 축내던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해 버렸습니다. 호포제를 실시하여 그동안 세금한푼 내지 않았던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하였으며 복장 또한 간소하게 하여 사치를 억제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불타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하였으며,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일절 불허하였습니다. 쇄국정책의 의지를 다지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중에서 호포제는 그동안 상민에게 부과되던 세금을 양반에까지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일반 백성들의 세부담을 줄여 주었습니다. 이당시 양반 계층이 상민계층보다도 많아져서 상민만 세금 걷어서는 부족한 재정을 메꿀 수 없었고, 양반만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 것도 있고, 경복궁 중건 같이 백성들의 원성을 받았던 정책도 있었습니다.

  이제 고종이 장가를 가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 감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고아였던 민자영을 간택합니다. 외척이 전면에 나서서 또 다시 나라가 혼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권세있는 가문의 딸보다는 왕비될 사람의 집안이 평범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민자영이 왕비가 되면 더 이상 외척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판단은 대원군에게 크나큰 실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아버지 대원군과 민 왕후는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조선의 국모가 된 민 왕후는 조정 일에 깊숙히 개입하였던 것입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은 민 왕후의 부추김에 힘입은 고종이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옵니다. 민 왕후는 자신의 친척들을 정치 일선에 불러들여 조정은 민씨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임오군란이라고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대가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민 왕후는 우대하였고, 구식 군인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구식 군대들은 대원군을 끌어 들어 난을 일으켰고, 흥선대원군은 이를 기회로 민 왕후를 축출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 왕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마자 충주로 잽싸게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리하여 청나라 군사 3천명이 한양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청나라가 들어오자 곧바로 구식군대 군인들은 진압이 됩니다. 청나라의 보호 속에 민 왕후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고,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의 우두머리로지목이 되어 청나라로 끌려갑니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과 민 왕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가 아닌 원수 사이로 변합니다. 

 시간은 흘러 동학농민운동으로 야기된 청일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게 1894년에 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청나라가 일본 군대에게 패하고 맙니다. 이제 조선은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게 싫었던 민 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항하려고 합니다. 다급해진 일본은 민 왕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1895년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에 난입한 일본 깡패들이 명성황후(민 왕후)를 죽입니다. 조선의 경복궁에서 일본 깡패들이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를 죽이는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본 놈들은 이 작전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민 왕후가 여우처럼 꾀가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작전에 흥선대원군도 개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며느리 민 왕후가 너무 미운 나머지 일본 깡패들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지요. 이때 고종은 왕비도 죽이는 무자비한 일본이 자신에게도 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이게 아관파천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공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만약 흥선대원군이라면 어떻게 며느리와 사이 좋게 잘 지낼 수 있을까? 또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을미사변 발생>

1895년 경복궁 옥호루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이지요. 

일본 낭인, 칼을 쓰는 깡패 같은 무뢰배 놈들이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치하포 사건>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서 국밥을 조용히 먹고 있던 조선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국밥을 먹고 있던 그 순간 그는,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주막집으로 들어오는 한 일본 사람을 보았습니다. 치하포 나루터는 일본인이 원래 일본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곳이었는데 왜 조선사람 복장을 하며 돌아다닐까? 하며 의심을 하며 그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런 의심을 하고 있던 찰나 조선 복장을 한 일본 남자가 칼을 지니고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니, 저 놈은 왜 굳이 조선 복장을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칼을 지니고 있을까? 저 놈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깡패놈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시해하고 여기로 도망한 놈 같구나. 만약 아니다 할 지라도 조선 복장을 하고 일본 칼을 가지고 다니는 놈은 언젠가 조선 사람을 해칠 것이다. 미리 손을 써야겠다. 내 저자를 죽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아야겠다.'

슬쩍 일본 남자 앞으로 간 조선 사나이

"당신은 왜 조선 복장을 하고 다니시오. 그리고 그 칼은 또 무엇이오?"

"이런! 빠가야로!"

조선 사나이를 향해 칼을 뽑는다. 하지만 조선 사나이의 발길질이 벌써 일본 남자의 급소를 강타한다. 그리고 그 칼로 일본 남자를 처단한다. 그 일본 남자는 조선 사나이가 짐작한 대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장교 쓰치다 였습니다.

이 치하포 사건으로 조선 사나이는 인천 교도소에 투옥됩니다.

<임금님의 전화로 사형집행을 면하다.>

사형이 언도 되어 사형 집행날을 기다리는 조선사나이

'난 조선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로운 일을 했기에 여기서 죽어도 원한이 없다.'

사형 집행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 

"전하! 지금 인천 교도서에는 명성황후를 시해에 가담한 일본 장교 스치다를 처단한 조선 사나이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임금은 급히 전화를 합니다. 이 전화기는 며칠 전 한양 궁궐과 인천 간에 개통되었던 전화기 였습니다.

"당장 그 조선인의 사형 집행을 멈추어라. 어명이다."

어명을 내린 이는 바로 고종이었고,

인천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조선 사나이는 김창수였습니다.

김창수가 누구인가?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당시 한양 외 전화가 개통된 곳은 인천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공식문서로는 남아있지 않고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어 스치다가 민간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육군 중위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구를 옹호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스치다는 민간인이다.', 김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스치다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이다.' 라고 주장하지요.

고종의 전화로 목숨을 건진 김구 선생은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온 힘을 쏟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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