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구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여기 관광하면서 사진만 찍었지 저게 누구의 동상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다시 체코 관광 책을 보니 그게 바로 얀 후스의 동상이더라구요. 

관광할 때에는 사전에 더 많이 공부하고 가야 되고, 관광 후에는 여행한 곳의 사진을 다시 보면서 복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얀후스는 체코의 신학자입니다. 성직자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성경을 유일한 권위라 주장했던 체코의 종교개혁가입니다. 존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지만 얀 후스는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얀후스는 1369년 체코 보헤미아 후시네츠 지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좀더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던 얀후스는 성직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프라하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으며 학장과 총장까지 역임합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의 저서를 접하면서 종교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는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

고 주장하며 로마 교황청에 정면 도전했습니다.

성 만찬 예식을 할 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성도들과 포도주를 함께 나눠 마시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완전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성배인 것도 얀후스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얀 후스의 행동에 정말 화가 많이 나겠지요. 

얀후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의 목적은 하나님이 내게 알려주신 진리, 특별히 거룩한 성경의 진리를 죽기까지 지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히 전능하게 서 있으며 영원히 전능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얀 후스는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다가 1411년 얀 후스는 설교 금지령을 당합니다. 성직자였는데 이제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악당과 같은 사람들에게 파문당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형편 없이 사는 것보다 진리를 찾다가 잘 죽는 것이 낫다.>

얀 후스에게 성경의 진리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또 얀 후스는 그 당시 교황권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합니다.


1. 교황무오설-카톨릭에서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사도권을 계승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봅니다. 따라서 교황에게는 잘못이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라고 합니다.


2. 고해성사 -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3. 상급자인 성직자에 대한 복종 - 이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4. 성직자의 독신 - 이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5. 면죄부 - 이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이렇게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오는 얀 후스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하여 화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얀 후스는 화형에 처해집니다.

화형에 처해 지기 전

<너희가 지금 거위(후스)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102년 후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울 것을 예언합니다.



구 광장에 얀 후스 동상과 함께 있는 틴성당입니다. 얀 후스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바로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성당입니다. 

위클리프에 있어서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위클리프가 생각한 참된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14세기 로마카톨릭은 조직화, 체계화되면서 종교를 뛰어넘어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권위를 갖게 된 교회는 두려울 게 없을 정도로 세를 확장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데 교회는 부패와 타락이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인 존 위클리프입니다. 종교 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우는 존 위클리프는 1329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옥스포드 발리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1370년 그는 점차 급진적인 종교적인 주장을 합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화체설의 교리를 부인하고, 성경과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 교황에 대한 직위는 성경 어느 구절에도 정당성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십자군 전쟁 후 이 전쟁을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몰락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303년 아나니 사건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필리프 4세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교황 보니파시우 8세가 반발합니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성에서 교황을 납치하고 유폐시킵니다. 곧 3일만에 풀려났지만 교황은 죽게 됩니다. 그후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간섭을 받으며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됩니다. 이제 교황은 원래 교황청이 있던 로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은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가지 말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이 생긴겁니다. 그러니 교황의 권위가 땅으로 떨어진 것은 말할 나위 없지요. 1307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던 기간을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듬해 선종합니다. 이제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있었습니다. 콘클라베는 새로운 교황을 뽑는 선거 시스템을 말합니다. 교황이 새로 뽑히면 굴뚝에서 하연 연기를 피어 오르게 하고, 교황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는 검은색 연기를 피어 오르게 합니다. 이 콘클라베에서 우르바노 6세가 교황이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콘클라베는 무효라고 하며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을 세워 <대립 교황>을 선출합니다. 이로서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2명 존재하며 교회의 극심한 혼란이 야기됩니다.


존 위클리프는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분열되는 전조 현상이라고 환영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주장하자 옥스퍼드대학에서는 그를 내쫓아버렸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의 근원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의 생애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노력했던 것이 성경번역 이었습니다. 

이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 일반 국민들이 읽고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라틴어 성경은 사제들만 독점되었고, 성경을 알고 싶으도 집에서 공부할 수 없으니 교회에 나와서 사제들의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요.

그리하여 일반 국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최초의 번역본 위클리프역 성경입니다.

이 당시 교황의 권위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타락과 세속화에 빠진 교회를 개혁하고자 교황과 맞서 싸운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발화점이 된 사람 위클리프의 생각은 체코의 얀 후스와 독일의 루터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존 위클리프는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사람이고 종교개혁의 발화점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성경 말씀을 전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난 44년 후 시신이 다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시신을 화형 시킨 후 남은 재를 강에 버린 것인지요. 


위클리프를 포스팅하면서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부를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나라 극히 일부의 교회를 보며 위클리프의 주장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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