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의 일부분입니다. 유교적 관습에서 이놈, 저놈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 어린이라는 용어로 존중받게 된 것은 방정환의 노력입니다. 소파 방정환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굵직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온갖 박해와 시달림 속에서도 방정환 등의 지식인들이 꾸준히 노력한 이유는 '내일은 잘 살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희망이란 내일의 조선 일꾼인 소년들과 소녀들을 잘 자라게 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는 신념아래 최초의 월간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1923년 세상에 처음 나왔는데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1925년에는 재판, 3판에 이어 4판까지 찍어내는 등 엄청난 인기를 받았습니다. 그해 서울 인구가 약 30만명 정도 되었는데 잡지 <어린이>가 팔린 부수는 약 10만부였으니 얼마나 큰 인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지만 <어린이>잡지의 인기는 날로 시들 줄 몰랐습니다. 방정환은 수십 개의 필명을 사용하며 직접 잡지의 기사를 쓰거나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가 부족한 상황이라 방정환이 여러 개의 필명을 가지고 글을 썼던 것입니다. 또 중간 중간에 퀴즈를 넣어 답을 맞힌 사람에게는 상품도 지급하여 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부록에는 조선 8도 윷놀이 판, 금강산 게임 말판, 세계 일주 말판 등을 실었습니다. 단순한 부록이 아니라 어린이들은 조선의 지리를 공부하며 민족 혼을 느끼고, 세계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어른들을 상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민족 혼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이 가만 있을 리 없었습니다. 어린이 잡지를 모두 압수하고 억압하였습니다. 잡지가 새로 만들어지면 먼저 일본이 사전 검열을 통해 많은 원고들이 잡지에 실리지 못하고 삭제당했습니다. 그래서 매달 1일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는 발행일자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일제의 강한 탄압이 있었지만 어린이 잡지는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잡지 일이 없는 날에는 아이들을 만나러 다녔으며 정기적인 동화 구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으며 방정환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습니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한 방정환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또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도 조직하여 소년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국으로 동화 구연도 하러 다니면서 피로가 점차 쌓여갔습니다. 원래 비만 체질이었던 그는 고혈압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로, 고혈압, 거기에 줄담배까지 건강을 해치게 되어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주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업적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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