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는 1809년 8월 9일 순조임금과 순원왕후 김씨의 장자로 태어난 효명세자 이영

4세의 나이에 이미 세자에 책봉이 되어 세자 수업을 받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세도정치란 세상을 도로써 다스리는 올바른 정치를 의미하는데,

조선 후기에는 외척들에 의하여 권력을 독점하던 정치형태로 변질되었습니다.

세도정치는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조만영의 딸이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어 헌종을 낳자 풍양조씨가 득세하였으며,

다시 철종시대에는 김문근 딸이 왕비가 되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효명세자빈은 나중에 신정왕후가 되어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둘째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신정왕후의 아들로 입적시켜 고종의 정통성이 효명세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지요. 그리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며 효명세자의 뜻에 맞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이런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는 문란하고, 왕권은 미약하여 민란까지 일어나 조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습니다. 

특히 북쪽에서는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홍경래는 평안도 출신의 과거시험 차별,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몸소 겪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난을 일으켰는데 실패로 돌아갑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김조순 일파가 정권을 잡아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를 때였습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던 순조는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순조의 뜻대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며 인사권까지 이양받아 명실상부한 왕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효명세자는 당시 권력의 핵심기구였던 비변사를 장악하고,

규장각까지 장악하여 세도정치를 척결하고자 노력합니다.

일사분란하고 시원스런 일처리로 신하들은 훌륭한 성군의 자질을 가진 세자가 나타났다고 칭송하였습니다.

전국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또한 과감하게 척결하였습니다.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양식의 상언이나 임금 행차시 징이나 꽹과리로 왕에게 읍소하던 격쟁을

적극 활용하여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세자가 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예악입니다. 

세종대왕 때부터 중시했던 예악을 장려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유교의 근본인 예악으로 덕망있는 군주의 존재를 알리고, 세도정치를 타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자료가 많이 없어져 제대로 된 예악을 행하지 못하자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장악원을 중심으로 효를 명분으로 한 예악을 중시합니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도 나오는 최초의 궁중 독무 춘앵전을 비롯하여 25종의 궁중무용과 이에 맞는 악장과 가사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또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직접 지어 신하들에게 읽게 했던 것이 효명세자의 예악이었습니다.

즉 예악을 통해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효명세자의 이러한 노력으로 왕권은 안정되고 민생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 5월 대리청정을 시작한 3년여만에 22살의 한창 나이에 각혈 후에 갑자기 죽고 맙니다.

각혈 후에 죽어서 폐결핵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한창 나이에 죽은 것을 반대파들이 독살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효명세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다스렸다면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고 백성들의 삶은 보다 안정되어 나아가 구한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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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화되고 수령과 아전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퍼집니다. 그래서 순조 때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중소 상인과 광산노동자와 함께 홍경래의 난을 일으킵니다. 평안도 지역의 차별로 인해 가산에서 시작되었으나 관군에게 집압되었다. 또 진주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납니다. 우병사 벼슬을 했던 백낙신이 탐욕과 수탈에 저항한 민란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나라의 정신을 세우고 통치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합니다. 몇몇 세도가에 의해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삼정을 개혁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중 진주민란의 원인이기도 한 삼정의 문란입니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곡이 있습니다. 전정은 농지에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군정은 군적과 군포에 관련된 규정입니다. 여기서 군적이란 군역 편성의 기준이 되는 문서를 말하고 군포란 병역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받던 베를 말합니다.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되받는 제도인데 오늘날의 복지제도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 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오르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여 하여도, 범같은 문지기가 버티어 있고 이정이 호통치며 소까지 끌고갔다. 이글은 정약용의 애절양에 나오는 것으로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까지 군포를 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41년 군적수포제 실시 이후 장정 1인당 군포 2필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게 되지만 특권 계층인 양반은 군포를 면제시켜 줍니다. 군적수포제란 모든 군정에게서 포 2필을 거두어 들이고 이 재정을 이용하여 군인을 고용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애정양처럼 3대가 함께 살면 자그마치 군포가 6필, 또는 한 가정에 장정이 세명이어도 군포가 6필을 내야 합니다. 여기에 지방의 수령과 아전들의 횡령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삼정이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배를 불리는 불법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 예로 군포를 내지 못해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게 대신 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인징이라고 합니다. 또 그 친족들에게 내도록 하는 것이 족징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동네 사람들에게 내도로 하는 동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물리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도 물리는 황구첨정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피폐해진 민심은 급기야 농민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세도정치는 극에 달해 지배층은 부패해지고 사회는 혼란해져 갔습니다. 이런 혼란을 바로 잡고자 등장한 흥선대원군은 각종 개혁의 칼을 빼어 듭니다. "이제는 양반들의 면세 특권을 폐지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양반 유생들이 "충신의 자손에까지 세금이 부과된다면 장차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까?"라고 반발을 합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일반 평민이 충신의 자손 몫까지 부담해야 한다면 이또한 충신의 본뜻이 아닐 것이다. 당장 시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법이 시행됩니다. 이제부터는 양반과 상민 관계 없이 군포의 부담을 져야 합니다.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들이 내게 되면 군포를 부담하는 사람들이 약 60% 씩이나 증가됩니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은 현저하게 감소되었습니다. 국가의 재정은 크게 확보되고 민심이 안정되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백성들은 동등하다고 말하면서 사족을 업신여기고 반호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포의 납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분수를 어기고 명령을 어기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반상의 구별을 두지 않는 세금징수제 호포법은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이유로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입지는 점차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던 군정제도의 개혁으로 사회적인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1882년 고종은 "서북인 서자 중인 하급 아전과 군졸 등을 차별하지 않고 높은 관직에 등용하겠다"라고 말하며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는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갑오개혁에서 조선의 신분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1894년 이후로 신분제도는 문서 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사회 전반에서는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신분제도가 암암리에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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