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참모총장도 마다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다.>

최용덕 장군은 일제 강점기 국권 상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 군인이 되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를 썼지요. 만주에 있는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서는 일본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서 항공기가 큰 역할을 담당하자 앞으로의 전쟁은 공군력에 있다고 보고 1920년에 중국공군학교에 진학하여 중국공군기지학교장까지 역임합니다. 한편으로는 의열단에도 가입하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습니다.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였습니다. 일본 패망 후 공군참모총장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중화민국(대만)의 요청을 마다하고 1946년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앞으로의 전쟁은 공군이 핵심 전력이기에 우리나라에 공군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나라를 지킬 만한 쓸만한 군대가 없었습니다. 

'음, 어떡한다...전쟁이 일어나면 공군력이 절대적인데...'

미군정에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중국군 복무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아 다시 군사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그는 공군 창설을 위해 쉰살의 나이에 이등병으로 육군보병학교에 입소하였습니다. 과거 중국에서의 화려했던 경력을 모두 버리고 아들뻘 되는 군인들과 땀을 흘리며 묵묵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47년 육군 소위로 임관되고 그해 다시 대위로 특진하여 육군항공기지 부대장이 되었습니다.(이때는 공군이 따로 없고 육군에 소속되었습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50년에는 6.25전쟁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공군참모총장이 되어서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결과 1953년 우리 손으로 설계한 <부활호>라는 국산 첫 항공기가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고, 1969년 8월 15일 <내가 죽으면 공군제복을 입혀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중화민국(대만)에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고난의 길을 걸으며 공군 창설을 위해 애쓰신 최용덕 장군님의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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