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칙령이란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4세가 낭트에서 발표한 칙령인데 칼뱅파 개신교인 위그노의 신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신앙의 자유만 보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신교와 구교사이에 발생했던 해묵은 갈등을 타파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넘어 국민통합과 평화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앙리 4세는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앙리 4세 이전의 왕들은 구교를 국교로 하고, 신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탄압과 재산 몰수 등의 처벌을 하였습니다. 파파라치처럼 그 당시에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었는데, 몰수한 재산의 25%을 위그노를 신고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그노를 신고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는데 이를 위그노 사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앙리 4세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더이상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또 모든 국민은 신앙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하였으며 프랑스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였습니다. 

  앙리 4세도 원래는 위그노였으나 프랑스의 왕이 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국왕 스스로 신교와 구교를 모두 껴안은 정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일요일에는 냄비에 닭 한마리씩"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신구교도간의 갈등에 시달린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매우 잘 헤아린 말입니다. 국민들은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냄비에서 고기가 끓는 냄새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이렇게 통합과 화합, 경제적인 문제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앙리 4세는 낭트칙령으로 호감을 받기는 했지만,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배신자라고 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것보다는 프랑스의 평화와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함께 고생했던 신교들을 잊지 않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박해나 차별을 하지 못하게 하고 국민들의 이익울 추구한 정책을 추진한 것입니다.

  일국의 왕이라면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앙리 4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책에는 '앙리 대왕', '선량왕 앙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앙리 4세의 정책을 종교적인 갈등을 끝내고 경제적인 성장을 가져오며 유럽의 강자로 떠 올랐습니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손자였던 루이 14세가 등극하면서 종교적인 갈등이 다시 생깁니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며 낭트 칙령을 폐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위그노들을 탄압하고 불법화 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절대왕권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신앙이 아닌 한 개의 신앙만 인정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몽텐블로 칙령으로 위그노들이 탈프랑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위그노들이 떠난 것이 뭔 문제가 되었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위그노들이 아주 중요한 것이 그들이 상공업 종사자였기 때문입니다. 직업 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의 생각대로 위드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를 떠나니 인재들이 많이 빠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상공업자를 비롯한 각종 기술자들이 프랑스를 빠져나가 프랑스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망명한 곳이 영국, 프로이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인데 이 국가들은 나중에 경제국 강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몽텐블로 칙령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하며 절대왕정을 꾸리면서도 위그노들에게 좀더 관대했더라면 당시에 프랑스는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낭트칙령과 앙리 4세를 읽고 강압보다는 관대함이 사람을 움직이고 나라를 움직인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해외 여행 시 시중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면세점에서 꼭 구입하는 향수.

향수는 어떻게 발전이 되었나 또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여행 시 산 향수인데 가격이 너무 싸요.

3만원대 향수인데 냄새도 무난해서 저는 3개 구입하고, 집사람은 20만원대 향수 2개 사더라구요.
차에 1개 두고 가끔 뿌리면 차내 향기도 좋아집니다.


중세의 프랑스 귀족들은 목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욕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역시 목욕을 무척 싫어하였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춤 연습을 하여 흠뻑 젖은 땀을 절대 씻지 않았다.

! 냄새...

그러면 어떻게 했느냐?

바로 깨끗한 옷을 갈아 입는 것으로 목욕을 대신했던 것이다.

일국의 왕. 그것도 태양왕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왜 그랬을까?

목욕이 그렇게 귀찮았나?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하인들이 목욕을 다 시켜주지 않았을까?

 

씻지 않은 이유는 왕의 주치의가

목욕을 하는 것은

병균을 몸에 바르는 행동이니 목욕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왕실이 이러하니 일반 국민들도 당연히 목욕을 기피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은 흑사병

도대체 흑사병이 왜 발생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자 의학자들은 병의 원인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어이없게도

목욕을 하면 병균에 잘 감염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인간의 몸은 스펀지 같아서 물을 만나면 스펀지처럼 병균을 잘 흡수한다고 주장하였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수증기는 병균을 옮기는 원인이며

물이 몸에 닿으면 더러운 물질이 몸 안에 들어가서 병에 걸린다고 주장하였다.

 

땀으로 생긴 때는 제2의 피부로 우리 몸을 보호한다고 믿었기에 목욕을 안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유익하다고 말했다.

결국 대중 목욕탕을 폐쇄하고 가정의 목욕탕 또한 없앴다.

 

목욕을 안하니 어떻게 되나?

몹시 심한 악취로 고생했으나 그게 오히려 건강미의 상징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특히 루이14세의 입 냄새는 몇m 떨어진 곳까지 풍기는 엄청난 악취라고 했으니 신하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 목욕은 언제 하는가?

의사들의 지시 하에 치료 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몸이 아플 때 조심히 실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심한 악취로 인해

왕족이나 귀족들은 향수나 화장품을 사용하여 자신의 악취를 중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유럽은 향수 산업이 대대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다.

목욕을 하지 않는 문화가 향수를 발전시키는 문화를 형성시켰다.

향수의 발전은 더더욱 목욕을 기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미국의 호텔들이 호텔에 목욕탕을 만들었다.

미국사람들은 호텔이 투숙하면서 목욕을 즐겼다.

그리고 호텔들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런 성공으로 목욕탕이 있는 호텔이 일류호텔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목욕을 통해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문화가 생겼다.

 

이 문화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목욕이 병을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깨지게 되었다.

 

저는 현재 목욕탕을 10년 정도 다녔습니다.

일반목욕탕이 아닌 온천입니다.

매일 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건성피부증세도 없어지고

특히 고질병인 비염도 사라졌습니다.

겨울이면 티슈를 들고 다니며 코를 풀거나

심한 재채기로 너무 힘들었는데 온천 다닌 이후로 모두 없어졌습니다.

 

매일 온천을 하니 온천물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는데,

지난 번 일반 목욕탕을 갔더니 물의 느낌이 너무 다르더라구요.

역시 온천목욕이 훨씬 제 몸에는 맞는 것 같습니다.

온천 가까운 곳에 살아서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가끔 온천을 찾아 여유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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