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구식군대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13개월이나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구식군대에게 한달치의 봉급미를 준다고 하여 선혜청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양도 부족하고, 더군다나 모래가 섞여 있는 봉급미를 보고 격분한 구식군인들은  1882년 6월 9일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다 민씨 일족 때문이라고 생각한 구식군대들은 민씨 일족과 별기군 일본 교련관 호리모토도 죽이고 일본 순사 등 일인 13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다급한 명성황후는 궁녀 복장으로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였고, 이 난국을 타개할 사람은 대원군밖에 없다고 생각한 고종은 대원군에게 반란을 수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민씨 일파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약 4,5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묄렌도르프와 위안스카이가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당했으며, 일본은 주모자 처벌과 배상을 하라는 위협을 하여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영효는 영국 공사 파크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청은 조선의 국내외 모든 일들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나는 청의 이러한 불의한 행동에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은 개화를 하여 나라의 힘을 키우자는 생각을 합니다. 조선의 개화파는 이 과정에서 청에 대한 태도와 개화의 범위와 속도 차이에 따라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온건개화파는 청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민씨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일본식 개화를 모델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를 빨리 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세력은 조선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김옥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관 도입은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위축됩니다. 급진개화파는 그 동안 추진해오던 개화 정책이 모두 후퇴할 위기에 처하자 급진개화파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거사를 도모합니다.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를 안심시킵니다. 더욱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정변이 나면 김옥균을 보호할 방침이며 청국의 현재 병력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 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굳게 믿은 급진개화파는 일본 군대를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 정부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민씨 일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변을 감행합니다. 사대당 요인을 연회에 초청하여 암살하려고 했으나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자 급진개화파는 고종에게 거짓 보고를 올려 고종의 거처를 경우궁으로 강제로 이어하게 합니다. 경우궁은 조선 후기 23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이며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입니다. 경우궁으로 이어한 후 사대당 일행을 입시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입시 명령을 받고 궁에 들어서는 사대당 사람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정변은 성공하게 됩니다. 다음 날인 12월 5일 급진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합니다. 그 다음날 6일에는 14개조 개혁 정강을 마련하여 국정 혁신을 모색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 갑신정변의 최우선과제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청에에 잡혀있다는 것은 자주독립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므로 대원군 귀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겠다는 것. 그래서 규장각을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당시 규장각은 학문 연구보다는 지배층 자제들이 입학하여 그들이 다시 관리가 되는 지배계층의 세습화가 되어 이런 폐단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 땅에 세금 매기는 법을 개정, 간사한 관리 근절, 간리들이 중간에서 세금을 착복하지 못하게 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겠다는 뜻입니다.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 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민씨 일족 가까이에 있는 내시들을 없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능을 우선적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 환상미는 빌려 쓴 쌀을 의미하는데 요즘의 농가부채를 말합니다. 이런 농가부채를 탕감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세도 가문의 자제들이 입학하여 관리가 되는 세습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 정변 후 사회 시국 안정을 목적으로 일본식 순사를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예전에 보부상이 강화도에서 군량미 운반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대원군도 보부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보부청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부청이 혜상공국으로 바뀝니다. 이들에게 각종 특혜가 있었으므로 상업적인 면에서 특정 단체가 상권을 독점하면 상업 발전에 방해가 되고 특히 보부상들이 민씨들과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의 특별 사면시키며 민심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 4영보다는 1영으로 해야 관리가 쉽고 , 근위대는 경계의 목적보다는 감시의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 재정을 일원화 하여 아무리 왕이나 왕비라 할지라고 돈을 쓰고 싶으면 호조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의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호조는 김옥균이 맡게 됩니다.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13,14조는 입헌군주제와 같이 고관회의를 통해 심의 처리하겠다는 것이고 일본처럼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 개혁정강 14개조를 발표한 6일 오후에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국 위안스카이의 군대 1,500여 명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철썩같이 약속했던 다케조에 공사는 일본군을 퇴각시켜 버리고 맙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살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됩니다. 이를 보고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어쩌다 조선 최고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서 그처럼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참으로 애석하다. 어찌 일본인이 조선의 운명을 위해 노력을 다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사상은 갑오개혁과 독립 협회 활동으로 계승되어 조선의 개화사상이 이어집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요약  (0) 2018.06.21
동학농민운동  (0) 2018.06.17
3일천하 갑신정변  (0) 2018.06.17
삼정에 대하여  (0) 2018.06.15
의롭고 자애로운 의자왕  (0) 2018.06.13
아쉬운 광해군  (0) 2018.06.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