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는 원래 성종의 후궁이었습니다. 한명회의 딸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일찍 죽자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비가 죽으면 후궁 중에서 괜찮은 사람을 계비로 맞이하였습니다. 폐비 윤씨(제헌왕후)도 괜찮은 후궁이라 여기고 계비로 맞이하였는데 알고보니 시기심이 많고 후궁에 대한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비상을 소장하여 후궁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도 하였으며 성종과의 불화로 어느 날에는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임금은 신하들과 자주 만나서 정치도 하고 학문도 토론하는데 신하들 보기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였습니다. 평소 중전의 행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제헌왕후를 1479년에 폐비시킵니다. 인수대비는 조선 여인들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하여 책을 내고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시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사건이 크게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폐비 윤씨는 3년 후 1482년에 사사당합니다. 그런데 폐비 윤씨를 사사한 사건은 연산군 시대의 화약이 됩니다.

 1483년 폐비윤씨의 아들 이융은 세자로 책봉됩니다. 성종의 새로운 계비는 정현왕후 윤씨인데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랍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사후 100년간 함구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성종은 죽습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처음에는 아버지 성종처럼 성군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살피고 선비들의 사가독서제도 계속 실시합니다. 조선 역대 왕들이 귀감이 될 내용을 모은 책인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등 좋은 임금이 되려는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선천적인 가정의 불화와 정치적 상황 등으로 연산군은 점차 비뚤어집니다.

 세자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허침과 조지서가 있었는데 세자 교육에 깐깐했던 조지서는 연산군이 공부를 게을리 하면 엄하게 이야기를 하며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연산군은 조지서를 소인배라고 부르며 허침을 따랐습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서는 결국 조지서를 처형해 버립니다. 또 아버지 성종이 아끼는 사슴이 있었습니다. 가끔 연산군은 사슴을 괴롭히거나 발로 차는 등 못살게 굴었습니다. 성종은 그 일로 연산군을 꾸지람 하였는데 나중에 왕위에 올라 결국 그 사슴도 죽입니다.

 신하들에게는 신언패를 차도록 하였습니다. 올바른 말은 연산군을 피곤하게 하므로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로 한 것입니다. 신언패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다. 혀는 살을 베는 칼이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연산군의 잘못을 말하려 해도 잘못 말했다가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시 김처선입니다. 그는 집을 나올 때 <내가 오늘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하며 입궐하여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직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활을 쏘아 김처선을 죽입니다. 그리고 화가 덜 풀렸는지 앞으로 문서에는 <처>자를 쓰면 안된다고 엄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과거 시험에 <처>자를 써서 낙방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가을의 문턱 절기인 <처서>도 <처>자가 들어간다고 하여 <조서>라고 바꾸었다고 하니 김처선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난 모양입니다.

 연산군은 사냥도 좋아했습니다. 활을 쏘며 동물을 잡는 것에 희열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사냥을 할 수 있도록 궁궐 주변 민가를 헐어버리고 사냥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궁궐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채홍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기생들을 발탁하여 궁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이를 흥청이라 불리웠는데 지금의 경회루 주변에서 매일 잔치를 벌이며 향략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신언패를 차고 있던 신하들은 멀찍이 구경만 할 뿐 함부로 직언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중궁궐의 이야기이지만 흥청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 백성들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흥청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한글 탄압도 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한글을 이용하여 자신의 폭정을 벽에 쓰자 한글을 탄압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글을 올리면 되지만 그때는 한글을 이용하여 벽에 붙이는 벽서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납니다. 무오사화는 1498년 사초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납니다. 사초란 사관들이 정리한 자료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됩니다. 성종이 죽은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훈구파였던 이극돈이 사초를 열람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의제문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뜻으로 주요 내용은 초나라 회왕(의제)이 숙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조선에 비유하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비유한 것으로 왕위 찬탈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못하니 중국의 사례를 들어 세조의 왕권 찬탈을 비판한 글입니다. 이극돈의 고변으로 그 당시 김일손 등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화를 입게 되고 김종직은 관에서 꺼내 부관참시 당합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사림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 훈구파들은 연산군을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것입니다. 여기서 훈구파는 고려를 몰아내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일어난 세력으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던 관리들로 보수 기득권 세력입니다. 반면 사림파는 선비들의 숲이란 뜻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세력에 뿌리를 두었으며 현실 정치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방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특히 세조의 왕권 찬탈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낙향한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핵심 인물이 김종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 1504년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납니다. 갑자사화의 핵심인물은 임사홍입니다. 그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과정을 연산군에게 고해 바칩니다. 성종 임금이 100년동안은 함구하라고 했던 유지를 불과 10년만에 깨뜨린 것입니다. 연산군에게 어떤 고기를 물려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펼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꺼내든 카드가 폐비 윤씨 문제였습니다. 임사홍은 아주 어질고 착한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비되었다가 사사되었다고 연산군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외조모를 궁궐에 데리고 와서 연산군을 만나게 합니다. 이때 외조모는 폐비 윤씨가 피를 토했던 적삼을 보여줍니다. 그걸 보고 원래 성격이 비뚤었던 연산군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내 이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라고 다짐하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폐부 윤씨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가 귀양을 보내거나 고문을 가하고 사약을 내립니다. 이것이 갑자사화인데 갑자사화로 인해 기존의 훈구파 뿐만 아니라 임사홍의 정적들인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굉필, 정여창 등이 대거 처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칩니다.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은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삶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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