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큐가 고작 43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보라고 취급 받았고, 저능아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한번 가르쳐 주면 금방 잊어먹고, 또 공부하면 금방 까먹고...

하나의 사실을 알고자 하면 수없이

반복해서 학습해야만 했습니다.

저능아라는 따돌림,

말도 더듬거리고, 눈도 처지고,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워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라이언의 아버지는 매일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는 아들에게


 라이언, 친구들의 말을 신경쓰지 말고 무조건 노력하렴.

그러면 그 친구들 못지않게 잘할 수 있을거야.


이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격려에 힘입어 아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속에서

라이언은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이언 부모님은 라이언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냈습니다.

일반학교에서는 많이 부족한 라이언을 받아 주려고 하지 않았으나,

부모님은 학교를 어렵게 설득하여 보통 아이들과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라이언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여 

그 어렵다는 미적분에 두각을 나타내어 3년만에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은 1%에 불과하고 노력이 99%라는 것을 증명해낸 라이언...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열성적인 노력은 훌륭한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 증명해낸 라이언...


지진아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봐 준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인 한비야 씨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읽었을 때에는 참 대단한 분이다. 라고만 느껴지고 겉핥기 식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긴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엊그제 책꽂이에 그 책이 꽃혀져 있어 저도 모르게 펼쳐보았습니다.

어느 한 마을에 어느 아낙이 먹을 것이 없어 풀 같은 것을 끓여서 아이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꼭 시금치 같이 생겨서 저거라도 먹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시금치가 아니고 독초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제 정신이 있는 엄마인가? 라고 생각한 한비야씨는 

이건 독초니 먹이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자 그 엄마는 한비야 씨를 바라보며

"이것을 먹고 죽으나 안먹고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하며 

아이가 저 독초를 먹고 지금 당장 배불리 먹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 한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즐겁게 놀다가 어느 순간 무덤이 한 두개 생기더랍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아이들이 의성콜레라에 전염되어 아이들이 한두명씩 죽어가서 무덤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링거 한병이라는데 당시 우리나라 환율로 800원이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즐겁게 함께 놀던 아이가 800원 정도가 없어 죽는것입니다.

너무 가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 내용이 사실 아닌 것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지만 분명 어느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책을 쓴 것이라고 믿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아이를 굶겨야먄 하는 어머니의 심정, 약이 없어 아이들이 죽는 현실은 사실이니까요.

어느 나라에서는 먹을 것이 풍족하여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데 골머리를 앓고

어느 나라에서는 먹을 것과 의약품이 없어 죽어 나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조금 관심을 갖고 정기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도움이 그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합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앞장선 일본의 이토히로부미

그를 1대 통감으로 조선에 파견시킵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도 해산시킵니다.

이렇게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원흉 이토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내립니다. 

그때 이토의 앞에 서서 그를 저격하고 외친 말

꼬레아 우라 - 대한민국 만세


이토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되어 러시아 법정이 아닌 일본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첫 공판 후 내려진 판결은

<안중근!!! 사형>

사형이 내려지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말합니다.

안중근: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늦추어 줄 수 있는가? 꼭 완성하고 싶은 책이 있다.

일본놈: 어찌 한달뿐이겠는가?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할 것이니 걱정 말라.

시간을 약속 받은 청년 안중근은 항소도 포기한 채 책을 열심히 씁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이제 막 서문과 첫 장을 마친 어느 날

안중근은 일본의 예정되었던 날짜에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날이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였습니다.

그러다가 69년 지난 일본의 국회도서관 자료실의 

수많은 책 더미 속에서 발견된 안중근의 미완성 저서 동양평화론

-수백년 동안 유럽 열강을 이끈 것은 도덕을 상실한 마음이다.

-귀중한 생명들이 무수히 희생되니 이들의 시체로 피바다를 이루는 날들이 끊이지 않는다.

-서양이 동양을 침탈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힘을 다해 방어하는 것이 제일가는 방법이다.


재판 시 판사가 물었던 말이 있습니다.

판사: 피고가 마음에 품고 있다는 정책은 무엇인가?

안중근: 일본은 야심을 버리고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해야 한다. 

          아시아 공동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해 상호 신뢰를 쌓아야 한다.

          강건한 청년을 모집하여 군단을 조성하고 서로의 언어를 배워 각국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

100여년전에 유럽 연합과 같은 공동체를 구상했던 안중근의 생각이 놀랍기만 합니다.

미완으로 남은 동양평화론에는 어떤 내용을 쓰고자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미완으로 남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큽니다.

지금 어디 어느 땅에서 쉬고 계시는지 시신조차 찾지 못해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안중근 의사...

그의 애국심과 평화정신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때는 1882년,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던 구식군인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급료를 준다고 모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급료를 받은 구식군인들은 쌀을 보고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선혜청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지키는 사람)의 농간으로 쌀의 양도 턱없이 적고, 그나마 모래가 잔뜩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한 구식군인들은 선혜청 고지기에 몰매를 가했습니다. 민겸호는 당시 선혜청 당상으로 구식군대의 폭동 주모자를 찾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구식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대접이 좋지 않게 된 것은 민씨일파의 개화정책 추진이라고 생각한 구식군인들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민씨 관리들을 죽이고 민겸호도 죽였습니다. 신식군대 별기군의 훈련교관 호리모토도 죽이고 일본 순사들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배후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왕비 민씨를 죽이려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왕비의 옷을 벗고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난을 피해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지요.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워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재집권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민씨 일파는 재빠르게 청나라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국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은 대원군을 제거하고, 임오군란을 평정하며, 조선의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 개입에 나선 것입니다.


 광동수사세족 오장경은 북양함대 군함 4척에 경군 3000명을 동원하여 덩저우를 출발하여 조선 남양만 마산포에 상륙합니다. 남양만 마산포는 현재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입니다. 그리고 한양에 입성하여 오장경과 원세개는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납니다. 그리고 청나라 진지로 답방하여 현재 조선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소수의 병력을 대동하고 남대문 밖에 있던 청나라 진지에 답방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청나라가 조선의 현실 문제에 대해 중재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주모자로 몰아 남양만으로 압송합니다. 재집권한지 33일만의 일입니다.

 남양만에서 청군 군함 등영주함에 실려 텐진으로 압송됩니다. 더 기막힌 것은 청군에 끌려간 대원군이 죄인취급 당하며 북양대신 이홍장의 국문을 받는 것입니다. 일국을 호령했던 대원군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홍장의 국문에 비굴하지 않았던 대원군에게 영원한 귀국 불가의 판결이 내려지고 바오딩 행정관청인 구 청하도서에 구금당합니다. 지금은 이곳이 헐리고 없지만 신 청하도서에서 대원군의 억류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감시병이 상주하고, 편지도 검열당하며, 외부인과 면담은 불가했습니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며 분노를 다스리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것은 신 청하도서의 안내문입니다. 현재 보수공사 중인데 안내문에는 "대원군이 패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왔다."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중국이 강제로 납치해 놓고서 도움을 줘서 중국으로 왔다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오장경과 그의 휘하였던 원세개는 조선에서 위압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고종은 오장경 일행이 청으로 돌아간 후 반청의 태도를 취합니다. 친러 정책이지요. 이에 청나라는 고종과 민씨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슬그머니 석방하여 조선으로 돌려 보냅니다. 원세개가 호위하였고 피랍된 지 3년 2개월만입니다. 운현궁으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이로당에서 칩거에 들어갑니다.

서월철폐, 경복궁 중건, 여러 정책들의 쇄신, 시대를 읽지 못한 쇄국정책 등을 추진한 대원군은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원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인 미우라에게 이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또 다시 권력을 잡는 듯 하였으나 친러파에 의해 바로 축출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98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힘없는 나라였기에 일국의 대원군이 납치당하고, 그들의 철저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이 참 슬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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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은 186493일 폭약공장에서 사고가 나 막내동생 등 5명의 목숨을 잃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짐한다. 사고없이 누구나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폭약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그 당시 폭약의 재료는 나이트로글리세린이었다.

당시 광산개발, 철도길 공사, 군대 등에서 폭약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노벨의 폭약공장은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나이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이 뛰어났으나,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폭발하니 다루기도 어렵고 운반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노벨의 공장에서도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세계 각국은 나이트로글리세린 사용을 금하기로 하였다.

노벨의 공장도 다시 재건축하여 공장허가 신청을 냈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 개발 독점권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려 쓴 상태였기 때문에 파산은 시간문제였다.

다급해진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어떻게 하면 폭발이 쉽게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연구를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트로글리세린이 들어있던 플라스크를 땅바닥에 실수로 떨어뜨렸다

그 순간 노벨은 ! 이젠 다 끝났구나!’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나겠지?’

그러나 나이트로글리세린은 폭발은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깔려있던 톱밥에 그냥 스며들었다.

노벨은 즉시 톱밥을 모아 폭발시켜 보았다

나이트로글리세린이 스며 들어 있어서 그런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폭발력은 있었다.

그래, 톱밥과 같은 물질을 찾아 다시 실험해보자. 액체인 나이트로글리세린이 폭발하지 않게 하는 어떤 물질과 반죽하여 만들면 될 것이다. 그 물질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숯가루로 반죽해보고, 벽돌가루 등으로도 반죽하여 만들었지만 폭발력이 너무 미미하여 실험은 계속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창고에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가져다 실험을 다시 하려고 했는데 나이트로글리세린과 규조토가 엉겨붙어서 생긴 반죽덩어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을 폭발해보니 순수 나이트로글리세린보다는 폭발력이 약했지만 뇌관을 작동해야만 폭발한다는 점에서 폭약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실험에 실험을 해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안전한 폭약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이너마이트이다.

다이너마이트를 광산에서도 사용하고, 공사장에서도 사용하고, 전쟁에서도 사용하고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노벨은 어마어마한 부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신문에서 죽음의 상인-노벨, 숨을 거두다.”라는 오보를 접하게 된다.

노벨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전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인류의 문화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제정된 상이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생리의학상, 경제학상 등이 있다. 우리 나라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다른 상에도 수상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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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밴드 음악 중 기타 사운드가 요란한 음악에는 록음악, 헤비메탈음악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는 헤비메탈을 좋아했지만 그다음 록음악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클래식 기타 음악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록음악은 원래 미국 흑인들의 음악인 블루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동맹을 맺고 유럽, 미국 등 연합군과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때 미국 군인들은 유럽으로 출동하여 영국군을 도와주었습니다. 바로 히틀러와의 싸움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군 조종사들은 독일군과 싸우다가 전투가 없는 날이면 미국에서 가져온 레코드 판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전쟁의 피로를 달래곤 하였습니다.

 미군 조종사의 선글라스 쓴 모습과 가죽 점퍼를 멋지게 차려 입은 모습을 보고 그 지역에 살던 어린 학생들은 미군 조종사들을 경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는 음악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린 학생들 중 몇 명은 기타를 스스로 배워 블루스 음악을 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기타를 들고 다녔더니 제 조카가 기타를 배웠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그 어린 학생들 중 네 사람이 의기 투합하여 날마다 기타연주를 갈고 닦으며 연습해서 소문이 났습니다. 미국의 블루스 음악에 매료된 네 사람의 고등학생들은 그 지역에서 점차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음악잡지사의 인터뷰가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의 연주 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밴드 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우물쭈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블루스 음악만 주구장창 연주했지 밴드명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느 한 학생이 "저희 밴드명은 롤링스톤즈 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학생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책상 위에 있던 레코드 판 중에서 <롤링 스톤>이라는 곡을 보았기 때문에 엉겹결에 대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전설적인 영국의 록그룹 롤링스톤즈가 탄생한 것입니다. 

 롤링스톤즈는 영국에서 정원에 있었던 원통 모양의 돌입니다. 비바람이 불면 정원이 깊이 파이거나 망가져서 큰 돌을 테니스 장의 큰 롤러처럼 만들어서 정원을 밀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단단하게 만들어 놓으면 비바람이 불어와도 정원이 덜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즉 롤링스톤은 부지런하게 정원을 잘 정돈하는 집은 번성한다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변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롤링스톤즈의 음악을 듣고 싶은데 제가 좋아하는 롤링스톤즈의 곡은 Angie, Paint it black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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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잘 관리되는 축구 클럽 중 하나 인 지도자는 금요일에 사임했으며 Twittersphere는 기쁨과 슬픔의 반대 방향으로 분화했다. 잉글랜드 축구 팬 중 절반은 아르센 벵거 (Arsène Wenger, 68 세)의 아스날 축구 클럽이 너무 늦었다 고 생각합니다. 다른 절반은 미덕을 장애로 만든 변화하는 산업의 잔인 함을 피했습니다. 벵거 감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의 클럽은 수익을 올렸지 만, 그의 가을은 훌륭한 리더의 운명이 바뀌지 않으면 업계가 얼마나 빨리 변화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줍니다. 프랑스 태생의 코치는 22 년을 보냈습니다. 교육받은 경제학자 인 그는 하드 스크 테이블 축구 코치보다 자신의 별명 인 "교수"를 더 많이 바라 보았다. 그러나 벵거 감독은 항상 냉담한 교수가 아니었다. 그는 2014 년 첼시 경쟁자 인 호세 무 링유와 충돌로 잘 알려져있다. 그것은 헌신과 성실의 아바타로 그의 호소에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나 벵거 감독은 항상 냉담한 교수가 아니었다. 그는 2014 년에 첼시의 경쟁자 인 호세 무 링유와 충돌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헌신과 성실의 아바타에게 호소했습니다. 아무도 게임에 대한 그의 영향력에 대해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공격과 패싱에 중점을 둔 방식으로 축구를 바꿨습니다. 그는 구매하기 전에 통계 데이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가장 먼저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임기 중에이 클럽은 인상적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만들었습니다. 재능을 사거나 개발할 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는 한쪽으로 내려왔다. "그것은 27 세의 28 세 아들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그는 2010 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선수들은 특별한 정신을 창조했습니다."라고 아스날은 말했다. 사람들에게 축구가 성공할 수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적어도 오랫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지도력하에 팀은 3 개의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 7 개의 축구 협회 컵 타이틀, 7 개의 커뮤니티 방패를 획득했습니다. 이 대회는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에서 20 년 동안 4 위를하며 6 위를 차지했습니다. 다른 프리미어 리그 팀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부채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년 경제학자들이 운영하는 팀이 이익을 기록했습니다. 벵거 감독의 임기를 끝낸이 위기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있는 독일 클럽과는 달리 급변하는 영국 축구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최근 몇 년 동안 은행 부문이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2016 년에 끝난 3 시즌 동안 프리미어 리그 클럽은 16 억 파운드 (22 억 2,000 만 달러)의 영업 이익을 창출했으며 이전 16 개 시즌을 능가했습니다. 벵거 감독은 그것이 영국 축구에 외국 돈이 흘러 들어가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것은 새로운 게임이었습니다. 회사는 비평가를 보호하기 위해 더 높은 임금을 받아 들여야했습니다. 재무 제표는 이제 수익성 하락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소비 무기 경쟁은 결코 벵거와의 경기가 아니었고 최근의 변화로 인해 팬들은 게임에서 벗어났습니다. 정치인, 기업 지도자 또는 스포츠 영웅 이건간에 리더의 출구에 대해 냉담한 태도입니다. 약간의 손실은 항상 나쁜 소식입니다. 기자들은 격렬하게 반응했습니다. 축구의 경우 치명적인 빚이다. 아스날의 현재 가격과 벵거의 가치가 계속해서 더 나은 결과를 내는지 여부는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는 지역 사회의 기둥이었습니다. 벵거 감독은 체르노빌 핵 재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활동가는 프리미어 리그 코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스날은 아이들에게 축구 장비와 서적을 제공하여 코치를 보냈습니다. 지난 해 아스날은 400 명의 소방관을 Grenfell Tower와의 전투에 초청하여 명예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Arsenal Way"는 클럽 활동, 젊은 선수 모집 방법, 지역 사회 참여 방법, 게임 방법 등에 관한 것입니다. Arsenal 웹 사이트 금요일에 간단한 잔인한 그림과 프랑스어 캡션 (Merci Arsene)이 나타났습니다. 축구 팬들은 달리기와 달리기에 관해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금요일 오후까지 런던 주변에는 많은 술집이 있었지만 시원한 날씨는 아니 었습니다. 삿대를 마칠 때까지 벵거 감독관의 유산 (그리고 계승)에 관해 논의 할 것입니다. 그들은 웽거의 호소력이나 계속되는 권력이없는 두 명의 솔직한 리더 인 도이체 뱅크의 우버 (Uber)와 트래비스 칼라 닉 (Travis Kalanick)과 존 크리 안 (John Cryan)이 제기 한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페이스 북의 마크 주커 버그 (Mark Zuckerberg), 영국의 테레사 메이 (Theresa May),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당신의 비전은 옳은가요? 관리 스타일이 효과적입니까? 지금 갈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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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에 대하여


  역사상 최고 실험물리학자이며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과학자, 전자기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이클 패러데이입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무학력자나 다름없는 열세 살 소년은 제본소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제본소에는 많은 원고들과 책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낮에는 유명한 학자들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었고, 밤에는 제본소에 쌓여 있는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제본소에서 과학 책에 흥미를 느끼며 읽던 중 그에게 꿈같은 기회에 찾아옵니다. 당시 유명한 과학자인 험프리 데이비가 실험실의 사고로 일시적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시력이 회복될 때까지 일시적인 조수가 필요했는데 이때 약간의 화학 지식이 있던 패러데이가 그의 조수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어느날 험프리 데이비가 전자기회전에 대한 이론을 구상하지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에 페러데이는 실험 구상을 하였고 시간 날때마다 전자기회전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전자기회전을 만들어 냅니다. 전류를 공급하면 지속적으로 기계적인 운동을 하는 모터의 원형이 발명된 것입니다. 전류를 지속적인 기계적 운동으로 전환하는 장치를 초보적이나마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산업과 생활 방식의 엄청난 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는 배운 것이 없어 어려운 과학이론을 몰라 수백번 반복되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떤 과학자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을 알아내는 데 그것은 바로 자기장을 전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연구와 발명으로 재물을 많이 모을 수도 있었지만 돈이 되는 특허권 제의를 거절합니다. 또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의 연합군이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크림전쟁을 위한 무기 개발 참여도 거부합니다. 영국 왕립연구소 회장직도 거절, 영국 왕실에서 주는 기사 작위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본적인 읽기, 쓰기, 산수 밖에 배우지 못한 변변치 못한 사람입니다."

  또 사람들이 '당신은 뉴턴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자격이 충분합니다.'라고 말을 해도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내 친구들이 묻혀 있는 조그만 공동묘지에 묻히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웨스트민스터에는 왕족이나 유명한 학자들이 묻히는 영예로운 일이나 그는 거절합니다.

  그 대신 배우지 못하여 꿈조차 꾸지 못하는 소년 소녀들을 위해 과학강연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평생을 과학의 전기분야에 연구를 몰두하여 오늘날 스마트폰이 노트북 등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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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가 정의한 직각삼각형 길이 구하는 공식을 중학교 때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루트라는 개념을 처음 배우면서 몹시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이게 뭔 숫자인가 참 힘들어 했으나, 곧 적응이 되어 쉽게 문제를 풀었지요. 지금도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피타고라스 정리.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만물은 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수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를 따르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입니다.

 그들은 정수와 분수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번째 정수는 1인데 1은 모든 수를 창조한 숫자라고 믿어 신을 상징하는 숫자였습니다. 2는 음을 상징하는 숫자로 여성을 나타냈습니다. 3은 양을 상징하는 숫자로 남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2와 3이 만나면 5가 되는데 5는 결혼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평화, 사랑, 풍부함 등을 모든 수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숫자와 연관이 있다고 믿었기에 엉뚱한 규칙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콩을 먹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누군가 콩을 먹으면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는데 이유는 콩을 가지고 숫자를 계산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콩을 가지고 계산했다 하여 그렇게 심한 형벌을 가해졌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규칙들을 잘 지켜야만 하였고, 수학적인 개인 연구 성과도 개인 발표가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정의로 발표하였습니다. 어느날 사원 바닥의 대리석 직각삼각형 무늬에서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피타고라스는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변의 제곱의 합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인데요. 이것을 통해 어떤  수라도 정수의 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 정리로 신전이나 원형극장 등의 건축물을 설계하여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제자 히파수스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변의 길이가 1인 경우는 빗변이 정수로 표현되지 않고 무리수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무리수의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연구 업적이 한 순간에 손가락질 받을까 걱정하였습니다. 분명히 정수의 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므로 변이 1인 직각삼각형에서 어떤 정수의 비가 있을 것이라고 꾸준히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무리수와 같은 새로운 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히파수스는 결국 학파의 비밀을 폭로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히파수스의 주장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했습니다. 히파수스의 주장을 좀 더 연구한 후 무리수에 대한 것을 피타고라스가 발견하였다고 공식으로 발표를 합니다. 루트2 라는 개념에는 이렇게 어두운 과거가 있습니다.   결론은 무리수는 피타고라스가 아닌 히파수스가 발견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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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련의 한 소절 "기도하는~~~~" "꺄아악"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포옹하는" "꺄아악" "가슴과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손길!~~~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아~~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물어보리라. 몰아치는 비바람을 철새에게 물어보리라.~~~"

"뿅뿅뿅~~ 뿅뿅뿅..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수울래~~~" 등등등 어렸을 때 불렀던 노래가 참 많습니다. 항상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조용필과 나훈아 특집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시청하면서 따라 부르고 참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왕 조용필도 어느 덧 데뷔 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참 긴 세월동안 우리나라 대표 가수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락, 민요, 트로트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음악을 발표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조용필은 원래 미8군에서 기타리스트로 데뷔하여 음악을 시작하였고, 1970년 가수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1집 앨범은 백만장이나 팔렸는데 그 당시 모든 앨범 판매량의 50%정도였다니 그 인기가 실감납니다. 1집 앨범 중 모든 노래가 다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단발머리, 돌아오지 않는 강, 정, 한오백년 등이 생각납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노력했던 가왕 조용필. 평양에서도 공연을 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북한 사람들에게도 전파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여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가수 주현미 남편도 위대한 탄생 기타리스트 출신이라고 하던데 정말 실력있는 뮤지션들은 위대한 탄생을 거쳐간 것 같습니다.

 곧 데뷔 50주년 기념 전국투어 콘서트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늘 변함없이 꾸준함과 성실함을 추구하는 조용필 선생님을 저는 변함없이 응원합니다. 19집 바운스를 발표하며 젊은 세대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 전국 콘서트 후 20집 앨범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노래를 위해 소식과 절주를 실천하고 계신다고 하시니 20집은 곧 나올 것이라 예상되고 그 자세에서 진정한 프로의모습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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