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 시험은 3년에 한번씩 치러졌는데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한양의 과거 시험장에서 낙담하고 돌아간 지방의 선비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문과의 최종 합격자는 33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팔도의 선비들은 이 과거시험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합격하기 너무나 어려워 다양한 꼼수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남의 답안지에 시험관 눈을 피해 몰래 자기 이름으로 바꿔 쓰기, 뇌물을 써서 시험관을 매수하기, 붓에 숨겨오기, 도포 자락에 예상 답안을 몰래 써 넣기, 밖에서 써준 답안지를 몰래 건네 받아 답안지 완성하기, 신체 일부 기관에 예상 답안을 숨겨 오기 등등 다양한 꼼수가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시험 전에 철저하게 몸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는 사람들간의 거리는 1.8미터를 유지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시험 감독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응시하는 경우는 그 사람을 다른 시험장으로 옮겨 배치하였습니다.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오려내아 따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누구의 글씨인지 시험 채점관이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시험관이 다른 종이에 답안을 옮겨 적은 후 채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걸리면 정도에 따라 3~6년 정도 시험볼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다른 사람 시험지를 보고 쓰다가 걸리면 곤장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문이나 혈통 등 모든 청탁과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시험과 채점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순수한 실력 만으로 인재를 뽑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평균 시험 준비 기간이 20년 정도 걸렸다고 하니 결국 과거 준비에 몰두할 수 있게 해줄 경제력이 필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경제력과 권력이 있는 양반 집안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평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는 있지만 책을 사야 할 돈이나 가정 경제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어 평민들은 과거 시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과 시험에서 소과는 생진과라고도 하며 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시험입니다. 이 소과를 합격해야만 하급 관리로 채용될 수 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대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소과에 합격한 후 대과 시험을 치르는데 초시는 수 만명의 응시자 중 240명을 선발합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240명을 대상으로 복시를 치릅니다. 복시에서는 총 33명을 선발합니다.(무과의 경우는 28명 선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전시가 있습니다. 전시는 합격 불합격을 따지는 것 보다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금님 앞에서 33명이 최종 순위 경쟁을 합니다. 최소 5등 안에 들어야 앞으로 고위 관료로 승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33명 중에서 1등을 하면 장원급제라 하였으며 이후 관직의 승진에 있어 많은 이점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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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잘 선발하여 유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를 통해 문신, 무신, 기술 전문직 관리를 선발했던 일종의 공무원 시험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무원 시험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뽑는 인원 수도 적고, 시험 공부 기간도 보통 20여년 정도 걸렸습니다. 물론 뛰어난 천재들은 일찍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과거 시험 중 무과 시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유명한 장군인 이순신 장군도 무과에 급제하여 장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도 말에서 떨어져 불합격하여 4년 후 다시 도전하여 1576년 병과 4위로 급제합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문신과 무신의 양반제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태종 2년인 1402년 무과 시험이 처음으로 시행됩니다. 3년에 한번 시험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치르는 별시가 있었습니다. 별시 중에서도 지방에서 행한 예도 있었는데 이를 외방별시라고 합니다. 세조 때에 온양, 평양, 강릉에서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양별시, 평양별시, 강릉별시라고 불립니다. 식년시 무과는 최종 28명을 선발합니다.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병과 4위이므로 석차로 따진다면 12등 정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종 28명의 고위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3단계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1차 시험은 초시라고 부르는데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190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을 보면 서울은 70명, 경상도는 30명, 충청도 25명, 전라도 25명, 강원도 황해도 영안도(함경도) 평안도에서 각각 10명씩 선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문신 1명과 무신 2명으로 이루어진 시험관 감독하에 공정한 심사를 거쳐 초시 합격자 중 28명을 추렸습니다. 이 시험이 2차인 복시입니다. 경국대전 병전 편에는 무예 실기과목이 적혀 있습니다. 모두 6개로 나누어 무예 실기 시험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240보(약 288미터)거리에서 화살을 쏘는 목전입니다. 목전은 시험용으로 나무로 만든 화살인데 3발이 사용됩니다. 둘째, 130보(약 156미터)거리에서 작고 짧은 화살을 쏘는 편전입니다. 편전은 애기살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짧고 사정거리가 깁니다. 셋째, 80보(약 96미터) 거리에서 무거운 화살을 쏘는 철전입니다. 깃은 좁고 날이 없는 둥근 철촉을 달았으며 사정거리는 80-180보입니다. 넷째,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입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5점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무예에서 중요시 되었으나 나중에는 총이 발달함에 따라 중요성이 떨어졌습니다. 다섯째, 말을 타고 달리며 창을 다루는 기창입니다. 말을 타고 가다가 목표물을 찌르면 점수를 얻었습니다. 여섯째, 말을 타고 작은 공을 다루는 격구입니다. 말을 타고 숟가락처럼 생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을 골대에 넣는 일종의 놀이입니다. 놀이이지만 조선은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생각하였으며 군대 열병식에도 꼭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무과는 이렇게 다양한 활쏘기와 마상 무예로 이루어졌으며 무과 실기는 최고의 무관을 선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세종 때 신하들이 문과는 어렵고 무과는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과에 많이 몰린다고 아룁니다. 사람들이 학문을 깊이 연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과에 몰리면 학문이 진흥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그래서 추가된 것이 복시에 병법과 유교경전 등에 관한 구술시험입니다. 장수가 무예만 있고 지략이 없다면 작전을 제대로 짜지 못하고 적을 관찰하여 변화에 수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구술 시험이 추가된 것입니다. 최종 28명이 선발되면 마지막 관문인 3차 시험 전시입니다. 이 시험은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무예를 시험하고 무예 점수에 따라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을 최종 선발합니다. 이중에서 갑과에 1등한 사람을 무과의 장원, 즉 무괴라고 불렀습니다. 화살을 쏘거나 창을 다루는 궁술과 말을 타는 기마 전술에 중점을 두었던 조선의 무과는 임진왜란 이후 변화됩니다. 바로 총포의 등장과 전술의 변화로 조총, 편추, 유엽전 등 무과의 시험과목이 확대된 것입니다. 약 500년동안 조선의 무장을 뽑은 무과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식 관리 선발제도가 생겨나면서 폐지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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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중국 명나라 대명률에 따라 우리나라 형벌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하여 실시하였고 형벌도 다섯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형법을 다시 만들지 않고 중국 명나라 것을 수정하여 쓴 이유는 대명률이 유교적 이념에서 만든 율서이기 때문입니다. 유교적 이념이 강하기 때문에 예를 중시하고 관용을 중시합니다. 그럼 다섯 가지 형벌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형벌인 태형입니다. 다섯 가지 형벌 중 가장 가벼운 형벌입니다. 엉덩이를 노출시킨 채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작은 형장으로 볼기를 칩니다.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서 10~50대까지 볼기를 쳤습니다. 

 둘째, 태형보다 죄질이 무거운 사람에게 내리던 형벌인 장형입니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으며 60~100대를 맞습니다. 긴 형장을 사용하였으므로 10대 정도만 맞아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형과 장형 모두 엉덩이를 노출 시킨 채로 대수를 세어가며 볼기를 쳤습니다. 다만 여인들이 죄를 지었을 경우 엉덩이를 노출시키지 않은 채로 볼기를 쳤습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 폐병에 걸린 사람, 임신부와 같은 사람들은 매를 맞지 않고 속전이라 불리는 벌금으로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셋째,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한 도형입니다. 중죄를 범한 자에게 노역까지 시키는 형벌입니다. 곤장 60대부터 최대 100대까지 곤장을 쳤습니다. 죄질에 따라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노역 기간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감옥에 복역하던 중에 병이 나면 병가를 주었고, 역모죄가 아닌 이상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휴일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넷째, 매우 중한 죄에 대한 형벌로 유형이 있습니다. 사형 대신에 먼 지방에 유배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것입니다. 유배 중에 간혹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양으로 복직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양에서 멀리 보내려고 이천 리, 이천 오백리, 삼천 리 세 등급의 유배거리가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아 유배지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에 맞게 끔 빙빙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태안으로 삼천 리 유배를 간다면 강원도나 충북까지 들러 삼천 리가 되도록 걸어 간 다음에 유배지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중죄인들에 대한 형벌이므로 홀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 격리하는 절도 안치와 거주지 제한하고자 유배지 둘레를 탱자나무로 둘러싸 가두는 위리안치가 있었습니다. 외부 출입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형벌이었던 안치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층에게만 적용된 형벌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가혹한 형벌이지만 유배는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과 정약용의 각종 방대한 저서들은 유배 중에 저술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사형입니다. 오늘날 교수형과 비슷한 교형, 목을 베는 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인 능지처참이 있었습니다. 역모를 범한 죄인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참형으로 목을 친 다음 베어낸 머리를 만인에게 공개하는 효수에 처해졌습니다.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는 대역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품위를 위해 사형이 아닌 사약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사약이라고 죽을 사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사할 사자를 씁니다. 즉 먹으면 죽는 약이 아니라 임금님이 내리는 약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세 차례에 걸쳐 정확히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잘못 조사하여 엉뚱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어 정확한 조사를 해서 임금에게 아뢰야 합니다. 시형 집행에 대한 권한은 오직 국왕에게만 있었으며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차례의 철저한 재판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형벌을 하면서 곳곳에서 형벌을 남용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문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형구의 규격과 사용법을 적은 흠휼전칙, 형법 내용을 보기 좋게 정리한 전률통보 등의 전문적인 법률 서적을 발행하였습니다. 지방관의 올바른 형장 사용과 공정한 법률 집행을 알아보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암행어사의 업무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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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시작하여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애국가에 대해 알아봅니다.  미국의 국가는 국기에도 나와 있듯 별이 빛나는 깃발이고, 영국의 국가는 입헌군주제답게 신이여 여왕폐하를 지켜 주소서이고, 일본은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하던 기미가요입니다.

 19세기 말 세계의 강대국과의 여러 조약을 맺으며 나라의 문을 열어 개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 나라의 힘을 키운 후 우리 나라를 야금야금 침략합니다. 이에 맞선 조선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을 하며 애국 애족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여러 가지 노래가 전국 각지에서 불리워집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식에서 양국의 국가를 연주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먼저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가가 없어 미국의 민요가 울려 펴졌습니다. 그때까지도 국가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은 조약식에서 연주할 국가가 없다는 것에 너무나 비통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종은 대한제국의 국가를 만들고자 합니다. 충성심을 돋구고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서양음악을 할 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양식 군악대도 만들었는데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월급인 300원을 지급하며 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군악대도 지도하고, 대한제국 국가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6원정도 였으니 월급 300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에케르트는 군악대를 가르치며 대한 제국 애국가를 만들었습니다. 피콜로, 오보에, 클라리넷 등 서양 악기가 연주되고 가사는 한글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사의 내용이 너무 어렵고 연주되는 악기 또한 우리나라 정서와 동떨어져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습니다. 일제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7년만에 부를 수 없는 곡이 되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올드랭사인 곡에 가사를 한국어로 하여 국가를 불렀습니다. 3.1 운동 때에는 이 노래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하였습니다. 윤치호가 작사하였다는 현재의 애국가 가사에 부르기 쉬운 올드랭사인 곡으로 부르니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익태는 아름다운 가사, 감동적이고 박력있는 가사에 남의 나라 민요를 빌려서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것도 이별할 때 부른다는 민요였기에 우리나라 애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꼭 애국가를 만들겠다는 집념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곡조를 넣어 만든 애국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에 공식 연주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는 일제 치하의 고난과 역경을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곡가 안익태는 후일 변절하여 일본을 찬양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애국가도 없습니다. 군대에서 매일 불렀던 애국가인데 요즘은 애국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각종 행사 시 열심히 애국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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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의 일부분입니다. 유교적 관습에서 이놈, 저놈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 어린이라는 용어로 존중받게 된 것은 방정환의 노력입니다. 소파 방정환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굵직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온갖 박해와 시달림 속에서도 방정환 등의 지식인들이 꾸준히 노력한 이유는 '내일은 잘 살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희망이란 내일의 조선 일꾼인 소년들과 소녀들을 잘 자라게 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는 신념아래 최초의 월간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1923년 세상에 처음 나왔는데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1925년에는 재판, 3판에 이어 4판까지 찍어내는 등 엄청난 인기를 받았습니다. 그해 서울 인구가 약 30만명 정도 되었는데 잡지 <어린이>가 팔린 부수는 약 10만부였으니 얼마나 큰 인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지만 <어린이>잡지의 인기는 날로 시들 줄 몰랐습니다. 방정환은 수십 개의 필명을 사용하며 직접 잡지의 기사를 쓰거나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가 부족한 상황이라 방정환이 여러 개의 필명을 가지고 글을 썼던 것입니다. 또 중간 중간에 퀴즈를 넣어 답을 맞힌 사람에게는 상품도 지급하여 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부록에는 조선 8도 윷놀이 판, 금강산 게임 말판, 세계 일주 말판 등을 실었습니다. 단순한 부록이 아니라 어린이들은 조선의 지리를 공부하며 민족 혼을 느끼고, 세계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어른들을 상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민족 혼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이 가만 있을 리 없었습니다. 어린이 잡지를 모두 압수하고 억압하였습니다. 잡지가 새로 만들어지면 먼저 일본이 사전 검열을 통해 많은 원고들이 잡지에 실리지 못하고 삭제당했습니다. 그래서 매달 1일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는 발행일자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일제의 강한 탄압이 있었지만 어린이 잡지는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잡지 일이 없는 날에는 아이들을 만나러 다녔으며 정기적인 동화 구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으며 방정환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습니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한 방정환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또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도 조직하여 소년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국으로 동화 구연도 하러 다니면서 피로가 점차 쌓여갔습니다. 원래 비만 체질이었던 그는 고혈압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로, 고혈압, 거기에 줄담배까지 건강을 해치게 되어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주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업적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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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는 원래 성종의 후궁이었습니다. 한명회의 딸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일찍 죽자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비가 죽으면 후궁 중에서 괜찮은 사람을 계비로 맞이하였습니다. 폐비 윤씨(제헌왕후)도 괜찮은 후궁이라 여기고 계비로 맞이하였는데 알고보니 시기심이 많고 후궁에 대한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비상을 소장하여 후궁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도 하였으며 성종과의 불화로 어느 날에는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임금은 신하들과 자주 만나서 정치도 하고 학문도 토론하는데 신하들 보기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였습니다. 평소 중전의 행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제헌왕후를 1479년에 폐비시킵니다. 인수대비는 조선 여인들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하여 책을 내고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시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사건이 크게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폐비 윤씨는 3년 후 1482년에 사사당합니다. 그런데 폐비 윤씨를 사사한 사건은 연산군 시대의 화약이 됩니다.

 1483년 폐비윤씨의 아들 이융은 세자로 책봉됩니다. 성종의 새로운 계비는 정현왕후 윤씨인데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랍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사후 100년간 함구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성종은 죽습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처음에는 아버지 성종처럼 성군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살피고 선비들의 사가독서제도 계속 실시합니다. 조선 역대 왕들이 귀감이 될 내용을 모은 책인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등 좋은 임금이 되려는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선천적인 가정의 불화와 정치적 상황 등으로 연산군은 점차 비뚤어집니다.

 세자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허침과 조지서가 있었는데 세자 교육에 깐깐했던 조지서는 연산군이 공부를 게을리 하면 엄하게 이야기를 하며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연산군은 조지서를 소인배라고 부르며 허침을 따랐습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서는 결국 조지서를 처형해 버립니다. 또 아버지 성종이 아끼는 사슴이 있었습니다. 가끔 연산군은 사슴을 괴롭히거나 발로 차는 등 못살게 굴었습니다. 성종은 그 일로 연산군을 꾸지람 하였는데 나중에 왕위에 올라 결국 그 사슴도 죽입니다.

 신하들에게는 신언패를 차도록 하였습니다. 올바른 말은 연산군을 피곤하게 하므로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로 한 것입니다. 신언패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다. 혀는 살을 베는 칼이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연산군의 잘못을 말하려 해도 잘못 말했다가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시 김처선입니다. 그는 집을 나올 때 <내가 오늘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하며 입궐하여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직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활을 쏘아 김처선을 죽입니다. 그리고 화가 덜 풀렸는지 앞으로 문서에는 <처>자를 쓰면 안된다고 엄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과거 시험에 <처>자를 써서 낙방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가을의 문턱 절기인 <처서>도 <처>자가 들어간다고 하여 <조서>라고 바꾸었다고 하니 김처선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난 모양입니다.

 연산군은 사냥도 좋아했습니다. 활을 쏘며 동물을 잡는 것에 희열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사냥을 할 수 있도록 궁궐 주변 민가를 헐어버리고 사냥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궁궐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채홍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기생들을 발탁하여 궁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이를 흥청이라 불리웠는데 지금의 경회루 주변에서 매일 잔치를 벌이며 향략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신언패를 차고 있던 신하들은 멀찍이 구경만 할 뿐 함부로 직언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중궁궐의 이야기이지만 흥청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 백성들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흥청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한글 탄압도 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한글을 이용하여 자신의 폭정을 벽에 쓰자 한글을 탄압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글을 올리면 되지만 그때는 한글을 이용하여 벽에 붙이는 벽서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납니다. 무오사화는 1498년 사초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납니다. 사초란 사관들이 정리한 자료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됩니다. 성종이 죽은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훈구파였던 이극돈이 사초를 열람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의제문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뜻으로 주요 내용은 초나라 회왕(의제)이 숙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조선에 비유하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비유한 것으로 왕위 찬탈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못하니 중국의 사례를 들어 세조의 왕권 찬탈을 비판한 글입니다. 이극돈의 고변으로 그 당시 김일손 등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화를 입게 되고 김종직은 관에서 꺼내 부관참시 당합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사림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 훈구파들은 연산군을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것입니다. 여기서 훈구파는 고려를 몰아내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일어난 세력으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던 관리들로 보수 기득권 세력입니다. 반면 사림파는 선비들의 숲이란 뜻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세력에 뿌리를 두었으며 현실 정치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방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특히 세조의 왕권 찬탈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낙향한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핵심 인물이 김종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 1504년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납니다. 갑자사화의 핵심인물은 임사홍입니다. 그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과정을 연산군에게 고해 바칩니다. 성종 임금이 100년동안은 함구하라고 했던 유지를 불과 10년만에 깨뜨린 것입니다. 연산군에게 어떤 고기를 물려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펼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꺼내든 카드가 폐비 윤씨 문제였습니다. 임사홍은 아주 어질고 착한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비되었다가 사사되었다고 연산군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외조모를 궁궐에 데리고 와서 연산군을 만나게 합니다. 이때 외조모는 폐비 윤씨가 피를 토했던 적삼을 보여줍니다. 그걸 보고 원래 성격이 비뚤었던 연산군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내 이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라고 다짐하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폐부 윤씨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가 귀양을 보내거나 고문을 가하고 사약을 내립니다. 이것이 갑자사화인데 갑자사화로 인해 기존의 훈구파 뿐만 아니라 임사홍의 정적들인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굉필, 정여창 등이 대거 처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칩니다.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은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삶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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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갑 년에 태어난 아이는 그 어버이를 비슷하게 닮는다고 합니다. 진짜 고종의 회갑이었던 1912년 옹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딸들이 병으로 모두 죽었는데 회갑 년도에 태어난 딸은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옹주는 너무나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고종은 늘 옹주를 데니고 다녔으며 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옹주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외롭지 않도록 하려는 고종의 조치였습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나이는 비록 제일 적었지만 조용한 성격으로 품위가 넘쳐났으며 머리가 좋았다고 합니다. 이 옹주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입니다. 고종의 쓸쓸한 말년은 덕혜옹주로 인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늘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덕혜옹주에게 시련의 서막이 오릅니다. 그건 바로 고종의 죽음입니다.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은 덕혜의 삶을 송두리째 휘둘리게 만듭니다. 덕혜의 나이는 불과 8살이었는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에 덕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종의 죽음으로 덕혜는 어머니 거처에서 지내다가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10살 무렵에 덕혜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게 됩니다. 일제는 조선의 황족을 없애기 위해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감언이설로 1925년 일본으로 데려갑니다. 옹주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던 집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 옹주가 도착한 날 밤 난 침대에서 옹주를 지켜보았다. 조용히 잠든 앳돈 얼굴에 애수가 서려 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옹주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한 눈빛은 찾아볼수 없었다."라고 아픈 마음을 표현하였다.

  어린 나이에 일제에 의해 어머니와 떨어져 강제로 오게 된 일본, 기댈곳 하나 없던 옹주는 고종의 독살을 의심하며 독살을 염려해 항상 자신만의 물병을 들고 다녔습니다. 1926년 순종의 죽음과 1929년 17세때 친어머니 양씨마저 세상을 떠나자 옹주는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말 그래도 이국땅에서 완전 고아가 된 것입니다. 학교가 시작되어도 가지 않고 종일 방에서 식사하러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가 밖을 걷고 있어 정신과 선생이 조발성 치매라고 진단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인들은 일본땅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강행한 것입니다. 결혼과 더불어 옹주의 병은 차츰 회복되는듯 하였으나 다시 결혼 6개월만에 재발하고 맙니다. 결혼 후 딸 정혜까지 얻으며 다소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덕혜는 조현병으로 고생합니다.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덕혜는 이혼을 하였습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도 있어 상당한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듣지만 광복 이듬해 정신병원에 들어가 약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정부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50세가 되던 1962년 1월 간신히 조국 땅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집이 아닌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지내야 했는데  56세가 되어서야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와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귀국 후에도 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가 1983년 정신이 맑을 때 쓴 낙서가 전해집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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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죽음>

 영조는 효장세자를 10살때 잃은 후 언제 아들이 태어날까 늘 걱정했는데 드디어 42살 때 아들을 얻었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아들이었기에 곧 왕세자로 책봉하고 애지중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조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급기야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극의 생을 마감합니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13일 이른 아침,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갔습니다. 몇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영조를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세자를 폐위하라-

청천벽력같은 임금의 목소리에 대신들은 그저 눈만 껌뻑거립니다. 영조의 분노를 알고 있는 대신들이기에 섣불리 나서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영조는 세자의 폐위를 결단한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입니다.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병으로 죽은 후 얻은 귀한 아들이라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칭해지고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어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735년 영조 11년 1월 25일)을 보면 <혈맥을 다시 잇게 되었으므로 종묘에 뵐 면목이 섰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도세자는 총명함과 영특함을 보이며 차기 임금으로서 타고난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8세에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이 시작된 후 세자의 태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학문보다는 그림그리기나 무인적 성격이 드러났으며 먹는 것도 많이 먹어 몸도 비대해졌습니다. 일찌기 조현명이 사도세자를 보고 효종을 닮은 세자라고 하며 경하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현명의 예언대로 사도세자는 활을 잘 다루었고, 힘도 장사였습니다. 무인적 기질은 책을 쓰는 활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학문보다는 무술을 좋아하는 사도세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영조는 사도세자를 자주 꾸짖게 되고 이런 상황이 싫은 사도세자는 영조를 멀리하게 됩니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세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영조는 여러가지 지적을 하며 사도세자를 불신하게 됩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보면 <세자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정하지 못해 내게 번거롭게 물으니 대리 청정을 시킨 보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사도세자의 정무적 능력을 불신하게 됩니다. 부족한 세자를 향한 영조의 질책은 신하들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질책이 계속되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갔습니다. 아버지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위에 올랐으며, 평생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영조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세자는 늘 부족한 아들이었습니다. 영조가 원하던 모습과 정 반대로 가는 세자를 보며 꾸지람과 냉대가 심해졌습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부터 병이 생겨 본성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영조가 매번 엄히 꾸짖으니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과 두려워 하는 마음이 생겨 병이 더해갔습니다. 세자의 병을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계증, 천둥과 벼락 소리를 무서워하는 뇌벽증, 옷차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의대증, 그외 헛것을 보거나 살인이나 자살시도 등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습니다. 폐사자반교에 따르면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불에 달궈 지지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가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나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적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많은 수의 궁녀, 기생, 여승을 가까이 하고 세자의 방탕한 생활이 지속되자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뿐 세자의 죽음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세자의 생모였던 영빈 이씨는 아들의 죄상을 영조에게 직접 고합니다. 그건 바로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반역죄>였습니다. 영빈이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왕)을 묻고자 했으며 저(영빈 이씨)도 몇 번이나 죽이려 했습니다. 비록 제 몸이야 괜찮지만 지금 임금의 위험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어찌 감히 제가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대처분을 하소서!

 이에 분노한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며 폐세자반교를 공표합니다. 세자가 자결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42살에 귀하여 얻은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합니다. 당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지는 사도세자, 하지만 그의 죽음에 따른 또 다른 진실이 반역죄였습니다. 그 후 영조는 사망한 아들을 생각하고 애도한다 또는 사도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요절하다 라는 의미로 사도세자라고 시호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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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입니다. 숙종의 부인은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황후 김씨, 희빈 장씨, 숙빈 최씨인데 이 중에서 아들이 있었던 부인은 희빈장씨와 숙빈 최씨입니다. 우리들이 사극에서 많이 봤던 것이 인현왕후 민씨와 장희빈 사이에서 있었던 권력의 암투입니다. 당시 서인들은 인현왕후 민씨를 지지하였고, 남인들은 장희빈을 지지하였습니다. 인현왕후 민씨가 중전의 자리에 있을 때는 서인들이 집권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되었을 때는 남인들이 집권하며 서로 권력 다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환국정치로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피튀기는 경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술환국 때 장희빈이 강등되고 인현왕후 민씨가 중전으로 복귀하면서 남인들은 정계에서 힘을 잃게 되고 서인들이 집권하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데 서인들도 소론과 노론으로 세력이 분리됩니다. 소론은 희빈 장씨 소생 경종을 지지하는 집단입니다. 아무리 희빈 장씨가 폐비되고 사약을 먹었지만, 그동안 정상적으로 세자자리에 있었던 경종을 왕위에 올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노론은 숙빈 최씨 무수리의 소생이던 연잉군을 지지하는 집단입니다. 경종은 사사된 장희빈이 아들이고, 만약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 연산군처럼 폭군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연잉군을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인원왕후 김씨를 중전으로 맞이하였는데 인원왕후도 연잉군을 지지합니다.

  노론은 정권을 잡으면서 연잉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경종은 왕위에 오르긴 올랐지만 그 집권 세력은 모두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노론세력들이었고 소론은 정말 적은 수의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의 왕좌였습니다. 노론들도 경종이 왕위에 있어도 별로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종은 왕권만 가지고 있지 나머지 권력은 모두 노론들이 틀어쥐고 있었으니까요. 경종 또한 몸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욕도 없을 뿐더러 무기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론들은 모험을 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확실히 지키고 경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계략을 세웁니다.

  먼저 경종 집권 1년 정도 지난 후 세제 책봉을 건의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몸 건강이 좋지 못하니 혹시 뭔 일이라도 발생하면 큰일입니다. 이에 세제를 책봉하시어 이를 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말 무엄하게도 안하무인격으로 경종에게 건의합니다. 세자 건저 문제는 정말 목숨을 걸고 건의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경종의 나이는 30대 팔팔한 젊은 나이였습니다. 정상적인 신하라면 경종에게 득남을 하여 조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고 건의해야 하는데 이들은 젊디 젊은 경종에게 세제 문제를 건의한 것입니다. 그 세제가 누구나 하면 자신들이 지지하던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우라고 건의한 것입니다. 선조 때에 정철이 건저 문제로 임금께 아뢰자 선조가 불같이 화내며 정철을 귀양보낸 것처럼 경종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경종은 정말 순순이 노론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노론들도 이렇게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무 쉽게 들어주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다음 세제 책봉 후 보름정도 지난 후 다음 계획을 세웁니다. "전하께서는 몸 건강이 좋지 못하니 세제에게 대리청정 시키심이 어떠하십니까?" 이렇게 건의합니다. 정말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경종이 반대하고 나올 것이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후 대리청정 문제를 거론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정말 순순이 경종이 윤허합니다. 경종은 "나는 몸이 좋지 못하니 병간호나 하겠다. 정치는 연잉군이 대리청정하도록 해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론들은 정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좋아하면서도 경종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것인지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론이 나섭니다. 소론들은 "전하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세제를 책봉하는 것이 어찌 말이 됩니까? 그것도 부족해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세제에게 대리청정 시키신다고 하신 것을 저 간악한 노론들은 반대도 하지 않고 어찌 한방에 넙죽 받아 먹습니까? 당연히 신하된 도리라면 대리청정을 일반 사양하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거두어주십시오."

  소론의 말을 들은 경종은 "그래, 소론들의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나는 대리청정을 한다는 것을 취소하겠다."라고 공표합니다.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한 노론들이 경종의 공표에 크게 당황합니다.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다는 죄목아래 노론들이 하나 둘씩 제거됩니다. 그 자리에 소론세력들이 들어섭니다. 아버지 숙종의 환국정치 기술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소론이 주류를 이루는 정치를 실현된 것입니다. 

  또 노론 세력을 초토화 시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목호룡의 고변 사건입니다. 목호룡은 남인계열의 서얼 출신입니다. 남인이것고 모자라 서얼이니 완전 정치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출세해 보려고 노론층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경종을 제거할 수 있는 세 가지 수법을 제시합니다.  그 수법은 [대급수-자객이 대궐 담을 넘어 들어가 칼로 해치운다. 평지수-궁인을 시켜 독살시킨다. 소급스-대궐을 봉쇄하고 가짜 폐위교지로 강제 폐출시킨다.] 라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알 순 없지만 목호룡과 노론과의 불화가 생겨 목호룡이 역모를 고변합니다. 이 사건을 세가지 방법으로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삼수의 역으로도 불리우는데 이 사건으로 노론 핵심 인물의 자제들이 국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삼수의 역의 핵심인물과 자객으로 고용될 사람이 연잉군을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만약 역모를 했으면 왕위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봐도 연잉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연잉군은 역모사건의 핵심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연잉군은 역모사건의 책임을 물어 귀양을 보내거나 사약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경종은 연잉군을 살려둡니다. 연잉군을 죽이면 다음 번 왕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왕실 사람은 연잉군밖에 없어 끝까지 연잉군을 보호해 준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연잉군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경종은 재위기간 내내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재위기간 후반부에는 점점 밥맛도 없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이에 연잉군은 형님의 건강을 염려해서인지 밥도둑이라는 간장게장을 경종에게 올립니다. 그리고 후식으로 생감을 올렸습니다. 정말 그날은 경종이 입맛이 땡깁니다. 그리하여 간장게장과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생감도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배탈이 나버렸습니다. 며칠동안 심한 설사로 인해 기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어의들이 약을 지어 올렸어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연잉군이 기력이 좋지 않을 때는 인삼이 최고이니 인삼을 올리는 것이 어떠냐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어의 이공윤은 자신이 처방한 약을 드시고 있는데 인삼까지 올리면 부작용으로 기력이 더 쇠약해질 수 있으니 절대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연잉군은 의술을 몰라도 인삼을 쓰면 좋다는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빨리 인삼을 지어 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소론이었던 이광좌도 연잉군의 말에 동의합니다. 인삼을 먹은 경종은 일시적으로 건강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갑작스럽게 경종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경종이 세상을 뜨자 무수리의 아들이었고, 경종과 권력 다툼이 있었고, 삼수의 역으로 거의 죽을 뻔했던 연잉군은 정말 정말 운이 좋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영조이기에 그에게는 컴플렉스가 많았습니다. 이런 컴플렉스가 있었기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잉태되었지 않았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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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일본 민심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여 뭔가 이벤트 행사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여 마치 조선이 일본에게 예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조선대로 일본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일본은 일본대로 임진왜란의 복수로 조선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더욱 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하여 일본 민심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의 대참사로 일본과는 교류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교류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여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슬슬 힘을 키우고 있던 때라 조선은 일본에 끌려간 임진왜란 전쟁 포로들을 데려와 민심도 안정시켜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선조는 1604년 사명대사에게 일본을 탐색하라고 <탐적사> 보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서 담판을 지어 사명대사는 1400여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1607년 <회답겸쇄환사>라고 불린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습니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회답하고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송환을 주된 업무로 한다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한 것은 1636년 인조 때 네번째 사절단이 파견된 무렵부터 였습니다. 이렇게 파견된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두 차례가 되었고 조선은 선진 문물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파견 인물로는 정사, 부사, 종사관, 통역관, 문서기록관, 의원, 화원, 마상재인(서커스), 악공 등 수많은 사절단을 구성하여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의 훌륭한 문화를 그들에게 보여주어 다시는 조선을 깔보지 않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그 시절에 통신사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6개월이 걸리는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일본을 깔보며 왜놈이라고 불렀으며, 교통 불편, 말이 통하지 않는 어려움 등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훌륭한 문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우월감(?),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등도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특히 열광한 것은 마상재인들의 승마기예였습니다. 말하자면 원조 한류 스타라고 볼 수 있겠다. 말을 타며 기묘한 재주를 부리는 조선의 마상재인들의 묘기에 일본인들은 넋을 잃고 감탄하며 열광한 것입니다. 그래서 1635년 이후로 일본에 파견할 때는 꼭 마상재인들이 따라가 마상 묘기를 선보였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본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문화적 자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륙의 정세도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이 다소 형식적으로 되다가 급기야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1811년 이후 통신사는 막을 내리고 맙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무사정권이 무너지고 천황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정한론이 대두되어 야금야금 조선을 침략해오는 파렴치한 일이 벌어집니다. 200여년간 통신사를 파견하며 양국의 우의를 다졌던 노력은 조선 후기 일본의 침략으로 허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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