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구려를 시작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갑니다. 고대국가라 함은 왕위가 세습되고,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를 수용하며, 영토를 확장하여 국가의 기틀이 완성된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기원 전 37년에 국가가 형성되어 태조왕 때 계루부의 고씨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고, 5부체제로 발전을 하며, 동옥저를 정벌합니다. 고국천왕 때에는 왕위 세습이 부자 상속이 되었으며,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을 시행하였습니다. 진대법은 흉년이나 곡식이 부족한 시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에 갚도록 한 구휼제도입니다. 진은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고, 대는 대여하고 갚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농민층의 몰락을 막고, 이들이 귀족 세력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금장수로 알려진 을불은 미천왕이 되어 영토확장에 열을 올렸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낙랑과 대방이 하던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어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졌습니다. 소수림왕 때에는 중국 전진에서 순도라는 사람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여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불교라는 하나된 신앙을 통해 나라의 정신을 통합하고 왕실과 부처의 권위가 같다고 생각하여 왕권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고구려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율령이란 옛날에 지켜야 할 법입니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 태학이라는 학교를 세웠는데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학에서는 중국으로 유입된 유교 이념을 가르쳤으며, 상류층 자제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 평민들은 태학에 들어갈 수 없어,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소수림왕의 업적에 힘입어 우리 역사상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이 즉위합니다. 최초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 방면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39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이룩한 공적은 서양의 알렉산더와 비견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의 업적은 광개토대왕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웠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하였으며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왕명이 장수왕인것처럼 오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전성기는 후대에 가면서 잦은 외적의 침입과 지배층의 반목으로 나라의 힘이 약해집니다. 연개소문, 양만춘 등 용맹한 장수들이 있어 당의 침입을 잘 막았지만 연개소문 사후 후계자들의 권력다툼과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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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여러 부족국가가 있었습니다. 먼저 부여입니다. 부여는 5부족 연맹체제로 되었으며 왕의 권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수해,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있으면 왕이 부덕하여 그렇다고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였습니다. 벼슬 이름은 가축의 이름을 본따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태사자, 사자 등이 있었습니다. 흰 옷을 즐겨 입는 풍습이 있고 가죽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반농 반목의 생활로 말, 주옥, 모피가 특산물입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실시하였으며, 순장이란 풍습으로 권력자가 죽으면 노비들도 함께 묻었습니다. 부여 시대의 법으로는 1책 12법이 있었는데 부여는 형벌이 매우 엄격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인자, 간음한자, 여자들의 투기는 사형에 처해졌고, 특히 사람을 죽이면 본인은 사형에 처해지고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12배를 배상해야 했습니다. 국가의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소의 발을 보고 점을 치는 우제점복이 있었습니다. 기우제나 전쟁을 할 때 소를 죽여서 그 발굽의 모양을 보고 발굽이 벌어진 상태로 소가 죽으면면 흉하고, 모아져서 죽으면 길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허무맹랑한 점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사취수제도 있었습니다.  가족 중 형이 죽으면 형의 부인, 즉 형수와 부부 생활을 계속하는 혼인 풍습입니다. 죽은 형을 대신하여 남은 부인과 자녀들을 동생이 보살피고, 형수가 형의 재산과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린다면 재산상 손해와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이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사는 제도였습니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제로서 제가회의에서 국가의 중요한 일은 여러 부족의 장들이 모여 심의 의결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농사짓기 좋은 지역이 아니므로 초기에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약탈경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집집마다 조그마한 창고인 부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동대혈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곳에서 신을 영접하고 10월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실시하였습니다. 풍습으로는 서옥제가 있는데 서옥이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혼인은 미리 말로 정하고 여자 집에서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사위될 사람이 기거합니다. 여자 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며 자식을 낳아 살다가 자식이 성장하면 여자를 데리고 남자의 집에 가서 살게 됩니다. 서옥제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풍습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옥저에는 읍군, 삼로 등의 정치적인 통치자가 있었으며 토지는 비옥하고 소금이 어물 등이 풍부하였습니다. 골장제라는 가족묘를 만들었는데, 죽은 사람을 가매장한 후 시체가 썩으면 뼈를 추스려 곽에 넣는 풍습입니다. 결혼풍습으로는 민며느리제가 있었습니다. 여자가 남자 집에 미리 가서 살다가 결혼하는 제도인데 여자나이 열 살 정도에 약혼하고 신랑집에 머물렀다가 성인이 되면 여자는 집으로 갔다가 다시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딸이 없는 집에서 여자 노동력이 필요하여 실시한 제도입니다.

  동예에는 옥저와 마찬가지로 읍군, 삼로라는 정치적 통치자가 있었으며, 단궁, 과하마, 반어피가 특산물이었습니다. 단궁은 작은 활, 반어피는 바다표범의 가죽, 과하마는 과일나무 밑으로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말을 의미합니다. 방직기술이 발달하였으며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책화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부족간 경계선을 넘으면 여러 가지 재물로 배상하던 제도입니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고 족외혼을 하였으며, 철()자나 여()자 모양이 집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삼한은 제정분리 사회였으며 목지국 지배자가 삼한을 지배하였습니다. 신지, 견지, 읍차, 부례라는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으며, 소도라는 신성지역을 두어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벼농사를 짓기 위한 저수지가 생겨났으며,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화폐로 사용되거나 낙랑과 왜에 수출하기도 하였습니다. 5월 수릿날(단오)과 10월 계절제(추석)라는 제천행사를 실시하였으며 반움집, 귀틀집에서 기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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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권람의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 3개와 무리들을 이끌고 신단수 밑으로 내려왔는데 그곳을 신시라 하였습니다. 풍백, 우사, 운사들로 하여금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세상을 교화시키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였습니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중간에 뛰쳐 나갔으나 곰은 묵묵히 버텨 여자로 변했고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습니다. 그가 고조선을 건국한다는 단군신화는 청동기 시대의 계급의 발생, 농사를 중시하는 문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제정일치 등 당시 고조선의 사회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청동기를 기반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입니다. 단군왕검이 세웠는데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인 군장을 의미하며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토는 랴오닝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대동강 유역까지 세력을 떨쳤습니다.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의 유물로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등장하였고 왕위는 세습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위만이라는 사람이 진한교체기 피란민들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고 세력을 키웠습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입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연나라 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통의 사람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기원전 194년에는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위만은 왕위에 올라서도 나라 이름을 바꾸거나 관료 조직을 교체하지 않았으므로 단군 조선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만 조선은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한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진 사이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였습니다. 고조선이 날로 세력이 성장하고 중계무역을 독점하자, 한 무제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고조선을 침략합니다. 한과의 싸움에서 약 1년동안 버티지만 지배층의 분열로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은 멸망합니다.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 한사군을 설치하여 지역민들을 통치하였습니다. 한사군(한 군현)은 토착세력의 끊임없는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으로 축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낙랑군은 313년 미천왕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고조선은 한서에 8조법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3개조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를 받고 싶으면 50만 전을 내야 한다. 고조선의 법을 통해서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과 노동력 중시, 사유재산이 있고 계급이 있는 사회, 형벌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군현 설치 이후 토착민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풍속도 각박해져서 법 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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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요 유적지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적곡리 유적,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 함북 웅기 굴포리 등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사용하던 도구로는 자연 상태의 돌을 그냥 사용한 뗀석기를 사용했는데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주먹도끼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를 캐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집은 따로 없이 강가에 대충 막 지은 집인 막집이나, 자연상태의 동굴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추위를 쫓거나 익혀 먹을 수 있도록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불을 피워 동물들의 위협을 이겨내고자 하였습니다. 옷은 아직 직조 기술이 없어 동물을 사냥한 후 동물의 가죽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먹는 것은 자연 상태의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먹는 채집생활,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먹는 어로 생활, 힘을 합쳐 동물을 잡아서 먹는 사냥생활로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사회생활은 무리 가운데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사유재산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는 구석기보다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를 사용하였으며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민무늬 토기나 덧무늬 토기도 있습니다. 가락바퀴와 뼈 바늘을 이용하여 원시적이지만 옷을 해입는 기술을 습득하였고 특히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리워지는 농경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조, 피,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으며 농경으로 인해 정착생활이 이루어집니다. 강가나 바닷가에서 주로 움집을 짓고 생활하였으며 중앙에는 화덕을 설치하여 난방을 하거나 음식을 데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는 씨족 사회로 배우자는 다른 씨족에서 구하는 족외혼이 유행하였고, 혈연 중심의 씨족 사회였다가 큰 무리를 이루면 부족사회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농사를 짓고 인간의 복을 기원하기 위한 원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무당과 그 주술적인 것을 믿는 샤머니즘, 동물이 자기 부족의 기원이라고 믿는 토템사상, 조상숭배 사상, 영혼 숭배사상등의 원시 신앙이 유행하였습니다. 유적지는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지(패총)이 유명한데 이곳에서 돌도끼나 빗살무늬토기까 많이 출도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 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싹텄습니다. 주로 지배층 계급에서 주술적, 의식적 용품으로 비파형 동검이나 거울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농기구는 아직 석기를 사용하였으며 특히 반달돌칼, 바퀴날 도끼 등이 유명합니다.  대표적 토기는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습니다. 미송리식 토기는 독특하게 손잡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은 고인돌입니다.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며 거대한 고인돌 일수록 권력과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청동기를 기반으로 나라를 처음 세운 고조선이 우리 나라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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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최제우가 창시한 우리나라 종교인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늘과 같다는 인내천사상이 농민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외세의 경제적인 침투가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쌀 수탈로 인해 쌀값은 상승되고 게다가 흉년이 들다보니 민심은 흉흉해져갔습니다. 살기가 점점 힘들다보니 농민들은 동학에 더욱 의지해갔습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어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뜯어가고 횡포를 부려가며 백성들 가슴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 김개남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전봉준의 별명은 녹두장군인데 키가 160도 안되는 작은 키지만 단단하고 야무졌다고 합니다. 녹두라는 곡물이 작고 단단하기 때문에 전봉준과 비슷하다고 하여 녹두장군이라 불리어진 것 같습니다. 전라도 고부에서 뭔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 받은 중앙에서 조사관을 파견하여 조사해본 결과 조병갑의 죄를 묻고, 또 농민들도 함께 죄를 물으려 하였습니다. 이에 농민들은 양반놈들은 다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며 다시 봉기를 합니다.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즉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폭압적인 탐관오리로 부터 백성들을 구하자는 구호 아래 관군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전라도에서 관군과 전투를 하여 관군을 격퇴하고 전주성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국내 정치를 개혁하려는 경향이었던 1차 봉기는 양반세력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반봉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차 봉기 때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한 것이 사발통문인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사발모양의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가면서 적은 통문을 사발통문이라고 합니다.

  전주를 장악한 농민들에 대해 정부는 청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텐진조약을 근거로 일본군도 우리나라에 파견됩니다. 동학 농민들이 원한 것은 반봉건인데 외세까지 들어와 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해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합니다. 전주에서 화해의 약속을 한 것이 전주화약입니다. 동학 농민군은 이때 폐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그 내용으로는 동학교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고 서로 협력한다.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를 징벌한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천인들과 백정들의 차별을 없앤다. 젊은 과부의 재혼을 허용한다. 왜와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한다. 토지는 균등히 나누어 경작한다.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 농민들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이 폐정 개혁안을 추진합니다. 정부도 교정청을 만들어 함께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주화약에서 외세를 몰아내고자 하였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에 농민들은 매우 화가 나게 됩니다. 또 청일 전쟁까지 발발하여 우리 땅에서 전쟁이 벌어져 우리 땅을 아수라장이 되고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2차 봉기는 공주 우금치에서 진압이 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이 됩니다. 1차 봉기는 양반들에 반감으로 일어났지만, 2차 봉기는 일본에 대항하는 반외세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민중들로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는 반봉건, 반외세운동의 성격이었으며 정치와 사회 개혁을 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 실패로 끝났지만 1894년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었으며,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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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구식군대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13개월이나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구식군대에게 한달치의 봉급미를 준다고 하여 선혜청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양도 부족하고, 더군다나 모래가 섞여 있는 봉급미를 보고 격분한 구식군인들은  1882년 6월 9일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다 민씨 일족 때문이라고 생각한 구식군대들은 민씨 일족과 별기군 일본 교련관 호리모토도 죽이고 일본 순사 등 일인 13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다급한 명성황후는 궁녀 복장으로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였고, 이 난국을 타개할 사람은 대원군밖에 없다고 생각한 고종은 대원군에게 반란을 수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민씨 일파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약 4,5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묄렌도르프와 위안스카이가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당했으며, 일본은 주모자 처벌과 배상을 하라는 위협을 하여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영효는 영국 공사 파크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청은 조선의 국내외 모든 일들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나는 청의 이러한 불의한 행동에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은 개화를 하여 나라의 힘을 키우자는 생각을 합니다. 조선의 개화파는 이 과정에서 청에 대한 태도와 개화의 범위와 속도 차이에 따라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온건개화파는 청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민씨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일본식 개화를 모델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를 빨리 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세력은 조선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김옥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관 도입은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위축됩니다. 급진개화파는 그 동안 추진해오던 개화 정책이 모두 후퇴할 위기에 처하자 급진개화파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거사를 도모합니다.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를 안심시킵니다. 더욱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정변이 나면 김옥균을 보호할 방침이며 청국의 현재 병력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 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굳게 믿은 급진개화파는 일본 군대를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 정부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민씨 일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변을 감행합니다. 사대당 요인을 연회에 초청하여 암살하려고 했으나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자 급진개화파는 고종에게 거짓 보고를 올려 고종의 거처를 경우궁으로 강제로 이어하게 합니다. 경우궁은 조선 후기 23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이며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입니다. 경우궁으로 이어한 후 사대당 일행을 입시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입시 명령을 받고 궁에 들어서는 사대당 사람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정변은 성공하게 됩니다. 다음 날인 12월 5일 급진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합니다. 그 다음날 6일에는 14개조 개혁 정강을 마련하여 국정 혁신을 모색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 갑신정변의 최우선과제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청에에 잡혀있다는 것은 자주독립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므로 대원군 귀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겠다는 것. 그래서 규장각을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당시 규장각은 학문 연구보다는 지배층 자제들이 입학하여 그들이 다시 관리가 되는 지배계층의 세습화가 되어 이런 폐단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 땅에 세금 매기는 법을 개정, 간사한 관리 근절, 간리들이 중간에서 세금을 착복하지 못하게 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겠다는 뜻입니다.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 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민씨 일족 가까이에 있는 내시들을 없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능을 우선적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 환상미는 빌려 쓴 쌀을 의미하는데 요즘의 농가부채를 말합니다. 이런 농가부채를 탕감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세도 가문의 자제들이 입학하여 관리가 되는 세습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 정변 후 사회 시국 안정을 목적으로 일본식 순사를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예전에 보부상이 강화도에서 군량미 운반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대원군도 보부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보부청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부청이 혜상공국으로 바뀝니다. 이들에게 각종 특혜가 있었으므로 상업적인 면에서 특정 단체가 상권을 독점하면 상업 발전에 방해가 되고 특히 보부상들이 민씨들과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의 특별 사면시키며 민심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 4영보다는 1영으로 해야 관리가 쉽고 , 근위대는 경계의 목적보다는 감시의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 재정을 일원화 하여 아무리 왕이나 왕비라 할지라고 돈을 쓰고 싶으면 호조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의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호조는 김옥균이 맡게 됩니다.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13,14조는 입헌군주제와 같이 고관회의를 통해 심의 처리하겠다는 것이고 일본처럼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 개혁정강 14개조를 발표한 6일 오후에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국 위안스카이의 군대 1,500여 명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철썩같이 약속했던 다케조에 공사는 일본군을 퇴각시켜 버리고 맙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살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됩니다. 이를 보고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어쩌다 조선 최고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서 그처럼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참으로 애석하다. 어찌 일본인이 조선의 운명을 위해 노력을 다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급진개화파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사상은 갑오개혁과 독립 협회 활동으로 계승되어 조선의 개화사상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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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화되고 수령과 아전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퍼집니다. 그래서 순조 때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중소 상인과 광산노동자와 함께 홍경래의 난을 일으킵니다. 평안도 지역의 차별로 인해 가산에서 시작되었으나 관군에게 집압되었다. 또 진주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납니다. 우병사 벼슬을 했던 백낙신이 탐욕과 수탈에 저항한 민란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나라의 정신을 세우고 통치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합니다. 몇몇 세도가에 의해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삼정을 개혁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중 진주민란의 원인이기도 한 삼정의 문란입니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곡이 있습니다. 전정은 농지에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군정은 군적과 군포에 관련된 규정입니다. 여기서 군적이란 군역 편성의 기준이 되는 문서를 말하고 군포란 병역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받던 베를 말합니다.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되받는 제도인데 오늘날의 복지제도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 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오르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여 하여도, 범같은 문지기가 버티어 있고 이정이 호통치며 소까지 끌고갔다. 이글은 정약용의 애절양에 나오는 것으로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까지 군포를 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41년 군적수포제 실시 이후 장정 1인당 군포 2필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게 되지만 특권 계층인 양반은 군포를 면제시켜 줍니다. 군적수포제란 모든 군정에게서 포 2필을 거두어 들이고 이 재정을 이용하여 군인을 고용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애정양처럼 3대가 함께 살면 자그마치 군포가 6필, 또는 한 가정에 장정이 세명이어도 군포가 6필을 내야 합니다. 여기에 지방의 수령과 아전들의 횡령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삼정이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배를 불리는 불법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 예로 군포를 내지 못해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게 대신 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인징이라고 합니다. 또 그 친족들에게 내도록 하는 것이 족징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동네 사람들에게 내도로 하는 동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물리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도 물리는 황구첨정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피폐해진 민심은 급기야 농민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세도정치는 극에 달해 지배층은 부패해지고 사회는 혼란해져 갔습니다. 이런 혼란을 바로 잡고자 등장한 흥선대원군은 각종 개혁의 칼을 빼어 듭니다. "이제는 양반들의 면세 특권을 폐지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양반 유생들이 "충신의 자손에까지 세금이 부과된다면 장차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까?"라고 반발을 합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일반 평민이 충신의 자손 몫까지 부담해야 한다면 이또한 충신의 본뜻이 아닐 것이다. 당장 시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법이 시행됩니다. 이제부터는 양반과 상민 관계 없이 군포의 부담을 져야 합니다.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들이 내게 되면 군포를 부담하는 사람들이 약 60% 씩이나 증가됩니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은 현저하게 감소되었습니다. 국가의 재정은 크게 확보되고 민심이 안정되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백성들은 동등하다고 말하면서 사족을 업신여기고 반호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포의 납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분수를 어기고 명령을 어기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반상의 구별을 두지 않는 세금징수제 호포법은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이유로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입지는 점차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던 군정제도의 개혁으로 사회적인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1882년 고종은 "서북인 서자 중인 하급 아전과 군졸 등을 차별하지 않고 높은 관직에 등용하겠다"라고 말하며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는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갑오개혁에서 조선의 신분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1894년 이후로 신분제도는 문서 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사회 전반에서는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신분제도가 암암리에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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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백제 31대 왕이자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의자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순느 없습니다. 다만 약 35살 전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의자왕으로 등극한 때는 약 42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의자왕은 해동 증자로 불리웠는데 증자는 공자님의 제자입니다. 아버지 증점 또한 공자님의 제자입니다. 하루는 증자가 잘못을 하여 아버지가 심하게 때립니다. 그런데 증자는 아버지가 때리는 무지막지한 매를 피하지 않고 온몸 그대로 전부 맞았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채 아들 증자를 심하게 매질한 후 술이 깨서 증자를 보니 아들의 몰골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하지만 증자는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하며 공자님이 알려준 피리 연주를 합니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효심이 깊었던 증자의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효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자님은 나중에 증자를 나무랍니다. 만일 네가 그렇게 두들겨 맞다가 혹시라도 죽으면 술에서 깬 아버지가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아버지가 때린다고 그걸 곧이 곧대로 다 두들겨 맞는게 효가 아니다. 라고 공자님이 증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와 싸울 수도 없고 어떻게 하란 말인지 물어보니 당연히 도망가야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술이 깨면 그때 용서를 빌면 되지 않겠느냐하고 증자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아버지께 절대 복종한 증자처럼 의자왕도 효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성충, 계백 등의 지략과 용맹함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나갑니다. 신라에는 김유신이 있다면 백제에는 성충과 계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견되는 인물입니다. 조선상고사에서 성충은 뛰어난 전략가라고 소개합니다. 예족이 백제를 침입했을 시 성충은 예족을 뛰어난 병법으로 예족을 물리칩니다. 성충에게 계속 패하자 예족 장수가 사신을 보냅니다. 그리고 비록 적이지만 나라를 위해 고생하는 너희들에게 귀한 음식을 주겠다고 하며 상자를 내밉니다. 군사들은 좋다고 하며 상자를 열려고 하였으나 성충은 열지 말고 불에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나중에 상자를 보니 그곳에는 쏘이면 엄청 고통받는 말벌들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예족 장수가 다시 상자를 보냅니다. 백제 군사들은 이놈들이 또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며 불에 태우려고 합니다. 성충은 그때 태우지 말고 열어보라고 합니다.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화약과 염초가 들어있었습니다. 불에 넣었다면 폭발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또 예족장수가 상자를 보내빈다. 그래서 군사들은 상자를 열어보고 무엇이 있나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때 성충은 열지말고 톱질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톱질을 하니 피가 나옵니다. 상자안에는 예족의 자객들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냥 열었다면 성충이 자객에게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실화라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성충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 수는 있습니다. 이런 활약상으로 의자왕은 성충을 총애합니다. 그리고 군사적인 충고를 구합니다. 성충은 김춘추가 곧 백제로 쳐들어 올것이라고 예상을 하며 대야성을 쳐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말대로 대야성을 점령하고 대야성주 김품석(김춘추 사위)을 죽입니다. 이에 김춘추는 비통한 나머지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궁인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고 적혀 있습니다. 의자왕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의자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궁인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이 의롭고 자애로웠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어 집니다. 또 삼천궁녀들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도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당나라의 역사서를 보면 백제 멸망 당시 사비의 인구는 약 5만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성비를 일대일이라고 가정하면 여성은 2만 5천명이 되겠습니다. 이 가운데 어린 여자아이와 노인들을 빼면 약 1만 5천명이 남습니다. 그런데 3천 궁녀라고 하면 성인 여성의 20퍼센트가 궁녀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진실인지 의문입니다. 또 부소산성에 올라보면 그리 넓지 않은 궁궐터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곳에 궁녀들만 3천명 살기가 비좁은데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백제보다 훨씬 강했던 조선 후기 궁녀 수도 5~600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백제 삼천궁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지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에 구중회 공주대 교수는 삼천궁녀란 과거 일부 문인들이 사용하던 감성적 표현이며 망국의 비애를 담은 시어 즉 문학적인 상징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삼천궁녀를 마치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마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대중 가요속에 삼천 궁녀라는 노랫말이 등장합니다. 확실한 역사적 근거도 없는 삼천궁녀가 대중가요를 통해 전달된 것입니다. 노래를 통해 가짜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우리들의 마음속에 정착된 것입니다. 이렇게 식민사관이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멸망을 당시의 정세 속에서 살피지 않고 의자왕이 방탕스런 생활에서 찾으려는 일본의 간교한 계략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이제는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의자왕이 방탕스런 왕이 아니라 의롭고 자애로운 왕으로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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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소생으로 둘째 아들인데도 15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북인 정권을 반대하던 서인들에 의해 쫓겨납니다. 죽은 후에도 조나 종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이란 칭호로 불리워 집니다. 여기서 묘호란 왕이 죽었을 때 생존의 업적을 참고로 하여 왕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왕이 살아 있을 때에는 주상 전하, 상감 마마 등으로 불리워지다가 왕이 죽으면 또 다른 칭호를 사용합니다. 죽은 왕에게도 주상전하, 새로 등극한 왕에게도 주상 전하 둘 다 똑같이 부를 수 없기에 새로운 호칭인 묘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조선 대부분의 왕들은 조나 종의 칭호를 받았는데 광해군은 후군 소생의 왕자라는 뜻으로 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 서인정권에게 쫓겨나 새롭게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전임금을 깎아 내리려고 쓴 호칭일 것입니다.

 선조는 정실 부인은 있었으나 그 사이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정실 의인왕후가 선조가 50대일 때 죽습니다. 중전이 비었으므로 중전을 간택하는데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가 중전이 되었습니다. 이때 인목왕후의 나이는 불과 19살 이었으니 선조의 아들 광해군보다도 아홉살이나 어렸습니다. 어머니의 나이가 아들보다 어린 셈입니다. 선조의 나이는 이미 50대인데 중전은 19살 어찌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신통하게도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당시 나이 50대이면 지금이야 한창이지만 그때는 노인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꿈에도 그리던 적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영창대군인데 선조는 너무나 기뻐하며 애지중지하였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을 제쳐두고 영창대군으로 다음 보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왕이 난리 중에 죽을수도 있으므로 서둘러 세자를 책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조의 뜻과는 맞지 않게 광해군을 세자를 책봉한 것입니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활동을 살펴보고, 국력을 모으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마 선조가 광해군으로 세자를 책봉한 이유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있었으나, 전쟁 중에 광해군이 죽으면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삼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정도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고 다닙니다.  임금은 의주로 몽진했으나 세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의병활동을 독려하니 세자의 인기가 점점 올라갑니다. 선조는 그래도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1608년에 선조가 죽습니다. 만약 선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영창대군이 임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목대비도 영창대군을 올리고 싶어했겠으나, 너무 어려 광해군으로 왕위에 올린다는 교서를 발표합니다.

 15대 왕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전쟁 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대동법을 시행하고,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도 완성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궁궐을 보수하고 각종 무기도 정비하여 국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또 실리를 중시한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시행하였습니다. 명의 쇠퇴를 틈타 북방에는 여진족들이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를 키워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명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조선에게 원병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참전을 시키되 전장의 상황을 보아가며 싸우라고 비밀 지시를 내립니다. 그렇게 참전한 강홍립은 싸우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고 맙니다. 그래서 후금과 조선은 친선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윤리를 중시했던 서인은 이를 맹비난하였습니다. 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구이고, 임해군도 죽였습니다. 윤리를 중시하던 서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인들은 힘을 모아 유교적 윤리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광해군을 수발하던 사람들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를 해도 꿋꿋하게 질긴 목숨을 이어갑니다. 아마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광해군이 좀더 대비를 하여 인조반정을 미리 차단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 이이반이 고변으로 정변 사실을 미리 알았는데도 연회를 하던 광해군은 그저 흘려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연회를 멈추고 관련자들을 색출하였다면 인조반정은 시작도 되기 전에 진압되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반정 가담자들은 이판사판으로 예정대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던 광해군을 포박합니다. 계속 광해군이 집권했다면 후금과의 관계를 중시했으므로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백성들이 전쟁의 2번이나 전쟁의 참상을 겪게 한 무능한 왕이 어쩌다가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는지 안타깝습니다.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게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고 했던 광해군은 저에게 아쉬운 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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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과거시험 무과에 대하여  (0) 2018.05.26

 효종은 인조가 청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했던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갚기 위해 청나라를 침공하려는 북벌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효종 시대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입니다. 이 무렵 청나라에 갔던 영국대사는 청의 군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청군의 군사력이 어마어마 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게 청군이 너무 강하니 청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면 안된다고 영국 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 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가 효종 시대의 청나라 였습니다.

 조선의 지식인 대다수도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이 청나라에 볼모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 북벌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종은 북벌을 꾸준히 추진하였습니다. 북벌을 위해 정예군을 뽑아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훈련 상황도 직접 평가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어느날 효종이 "여기에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이 깃발을 가장 먼저 뽑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단순히 기마병들의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각 부대별로 진열을 갖추고, 신호에 따라 질서 있게 군령을 지키며 신속하게 진격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효종이 기를 흔들면 준비하고, 나팔을 불면 전 부대원이 출발한다고 말한 후 친히 산 위에서 신호를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효종은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효종이 산에 오르기도 전에 신호를 내리기도 전에 군사들이 서로 먼저 깃발을 차지하려고 달려 나갔습니다. 군대의 진영은 엉망진창이고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군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명령과 신호에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는 것인데 신호에 따르지 않는 군사들을 보고 효종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청의 팔기군의 훈련은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에 그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청은 되는데 조선이라고 안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지휘관을 불러 크게 혼을 내고 다시 훈련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효종이 깃발을 들고 준비 신호를 보냈지만 벌써 출발한 군사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군사들도 먼저 깃발을 차지하겠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출발하였습니다. 효종은 너무너무 화가 났습니다. 효종은 먼저 출발한 병사를 잡아다가 죽이고 부대 앞에 목을 걸어 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많은 훈련을 하였는데도 신호를 지키지 않는 기본조차 되지 않았던 조선 최고의 정예병을 보고 단단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북벌을 하고자 하는 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대국 청나라인데 조선군은 오합지졸로 현재 상태로는 100% 참패를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모태가 되는 건주여진은 원래 조선군에게도 대적할 수 없었던 너무나 미약한 부족이었습니다. 명나라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던 여진족에게는 명을 정벌해야 한다는 강한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명을 정벌해야만 여진족의 처지를 바꿀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또 명과 조선에게 핍박을 받았던 부족들에게 여진의 지배층은 명을 정벌해야만 우리들이 훨씬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명을 정벌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보다 나은 삶을 향해서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고 전술을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훈련 할 때에는 무조건 참여가 아니라 수당도 지급하여 훈련 참여 동기를 북돋아 주고, 명을 정벌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효종은 청에 있으면서 명나라를 정벌한 것처럼 조선도 청을 정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효종은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북벌에 대한 강한 공감과 의지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청은 명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라 명을 쳐야만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조선은 청을 쳐야만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자 라는 것은 조선의 아픔이지 단지 그것 때문에 행복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효종의 북벌론은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매우 큰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계획에 백성들은 꼭 북벌을 해야만 하는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동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북벌을 하자 라는 구호만 요란했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훈련에 참여하거 억지로 훈련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호를 무시하고 먼저 깃발을 차지하려고 달려나간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통일을 해야 한다. 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라고 백날 떠들어봤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의 통일을 해야 한다는 가치가 있는지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래야만 국민들이 스스로 통일에 대해 노력할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되자. 라고 구호를 외쳐도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것입니다. 북벌도 그렇게 구호로만 끝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북벌을 추진하며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던 효종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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