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나이는 당시로 보면 고령이니 세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이성계의 부인은 신의왕후와 신덕왕후가 있었습니다. 

신의왕후 소생은

이방우(진안대군),

이방과(영안대군),

이방의(익안대군),

이방간(회안대군),

이방원(정안대군),

이방연(덕안대군)이 있고,


신덕왕후 소생은

이방번(무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이 있었습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이방원이 제쳐두고

권력과 거리가 먼 이방석을 세자로 앉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정도전이 계획한 신권 중심의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자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의안대군으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왕족과 신하들이 거느린 군인들을 국가의 군대로 만들자고 주장합니다.

사병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왕에게 반역하는 무리가 생길 것이고,

현재 국방력이 약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원과 같은 왕족의 군대를 혁파하여 힘을 빼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에 이방원은 엄청난 분노를 느낍니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찬스가 찾아옵니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성계도 병으로 몸져 눕고 맙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을 처치하고,

궁으로 들어가 신덕왕후 소생인 이방번과 세자 이방석을 죽입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세자책봉과 왕위계승권 문제로 정도전과 이방번, 방석 형제들을 죽인 사건입니다.


나중에 이 사건을 알게 된 태조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내고

왕위를 내려놓고 함흥땅으로 가버립니다.


그럼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까요?

아닙니다.

첫째형 방우는 이미 죽었으므로 둘째형 방과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장자 세습을 지키려는 것이지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표면적으로나마 천명한 것이지요.


이방원이 그렇게 노력하여 조선 개국을 도왔는데,

왕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배다른 형제에게 돌아가게 되어

화가 났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 정도로 권력 앞에서는 형제도 부모도 없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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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임금을 꼽으라면 영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무수리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탕평책을 펼치며

인재를 고루 등용했던 왕인 영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영조하면 사도세자가 떠오릅니다.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넣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영조.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영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최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을 두었는데 경종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습니다.

경종을 밀었던 소론 세력들은 연잉군(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티격태격하며

붕당정치를 하였습니다.

노론들은 경종이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하고, 

더 나아가 대리청정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론은 장희빈이 사사될 때 찬성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입니다. 

그러니 경종이 왕위에 있으면 자신들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으므로,

연잉군을 지지하여 어떻게 해서든 왕위에 올려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경종은 노론을 역모로 다스려도 시원치 않을 사건이지만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 시키고, 

또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지요.

영조는 이렇게 노론과 소론들의 싸움 틈바구니 속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붕당정치의 폐해를 몸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 탕평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즉 어느 당파든 능력과 재능에 맞는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발전을 도모한 것입니다.

영조의 이런 노력으로 정치가 빠르게 안정되어 갑니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2포에서 1포로 줄여줍니다. 

군포란 군대를 안가는 대신 세금으로 옷감을 내던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지방 관리들이 군포를 많이 걷거나, 

군포를 내기 어려워 도망간 이웃의 군포까지 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영조임금께서 군포를 1필로 내라고 했으니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갑니다.

또 모내기 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이 증가하여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첫 번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효장세자인데 안타깝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나이 42세에 드디어 아들을 보았습니다.

당시 42세이면 노인층에 속하는 나이였으므로, 

아주 늦게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아버지 영조를 흐뭇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공부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영조는 세자가 무예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에 마땅찮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붕당 정치 속에서 임금이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세자가 공부를 멀리하고 있으니,

아버지 영조의 불만과 실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러다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봅니다. 

대리청정을 하는 사도세자는 위엄있게 정치를 잘 합니다.

사도세자가 노론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에 슬슬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대리청정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정치를 잘하면 노론의 견제를 받고, 정치를 못하면 아버지 영조의 질책이 뒤따랐으니까요.

아버지 영조는 계속 사도세자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그러자 세자는 영조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마음의 병이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 문안을 하러 가는 것이 너무 싫어집니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 아파서 문안을 안가니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계속 꾀병이나 다른 이유를 대며 문안을 가지 않습니다.

상궁들이 입을 입혀 주면 옷을 벗어버립니다. 그 옷을 입고 영조에게 문안을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상궁이나 내시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관서지방 기행 등 세자의 비행을 나중에는 영조도 알게 됩니다.

나중에는 친어머니인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영조에게 주청합니다.

사도세자가 동궁에서 칼을 들고 영조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전한 것입니다.

세자의 비리를 고발한 나경언의 고변도 영조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똑똑하고, 사도세자는 정신질환 등으로 가망없다고 생각한

영조는 사도세자 스스로 자결하라고 합니다.

말을 따르지 않자 뒤주에 가둬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듭니다.

 영조가 스스로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이 너무 안타깝고,

 너무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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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과정


원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 한족이었던 주원장이 난징을 수도로 하여 명을 건국하였습니다.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수탈과 횡포,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질 등으로 민심은 극도로 혼란해졌습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여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최영과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들을 무찌르며 신흥무인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명이 점점 힘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 고려 조정에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였습니다.

고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최영은 즉시 반발하여 명을 정벌해야 한다고 하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말하며 명나라를 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은 최영이므로 상관의 명에 의해 이성계는 출병하게 됩니다.

이성계 군대가 드디어 도착한 곳은 압록강 하구 지역의 위화도.

때마침 홍수가 있어 압록강이 물이 불어 14일간 진군을 하지 못하고 위화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좌군 도통사인 조민수와 협의 끝에 회군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위화도에서 회군(1388년)하여 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을 처리하고, 정치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합니다.(우왕은 강화도에 유배, 최영은 유배 후 처형, 우왕 아들인 창왕이 등극)

토지제도도 개혁하여 경기 일대의 토지를 관료들에게 나눠 주고, 수조권만 갖게 합니다.

즉 토지는 나라가 소유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만 거둘 수 있는 권리만 준 것입니다. 

과전법 시행으로 넓은 토지를 소유했던 권문세족들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고려를 개혁하는 방향에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합니다.

정몽주, 이색은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점진적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고

조준, 정도전은 고려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런 대립에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온건 개화파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합니다.

이로써 조선왕조 오백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성계의 4불가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순 없다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홍수 및 전염병 위험이 있다.

-명을 정벌하러 갔을 때 왜구가 침입해 올 수 있다.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진다.


<조선의 건국과정>

-권문세족의 횡포,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세력의 등장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 우왕 제거

-온건개화파 제거

-토지제도 개혁(과전법)

-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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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전쟁 중 명나라와 조선이 일본과 싸우는 도중

만주 지방에는 후금이 점차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면서 후금은 힘을 키워가며 명을 위협합니다.

위기를 느낀 명은 조선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가 너희 조선을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임금인 광해군은 실리를 추구하는 왕이었습니다.

나라의 힘은 없는데 명나라 편에 설 수도 없고, 후금에 설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부의 정치 세력들은 참으로 의리 없는 짓이라고 하며 반정을 일으킵니다.

그게 바로 1623년에 서인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입니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바라보니, 

명나라와의 명분만 고집하는 서인정권이 들어서 있는 것을 곱게 볼리 없었습니다.

"어라! 우리를 반대하는 것들이 왕을 해먹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네!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손 좀 봐줘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1636년 12월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동안 청군은 조선땅을 마음껏 유린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치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청의 황제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세번 절을 하는데 절할 때마다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의 예를 올립니다.


인조는 정축화약의 항복 조건으로 내세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서양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놀라운 서양 문물을 보며 소현세자는 조선도 청나라처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9년간의 볼모 생활이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는 인조에게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조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치욕을 청나라에게 당했는데 

그런 나라와 화친해야 한다는 소현 세자의 말을 듣고 슬슬 분노에 가까운 화를 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자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서삼릉 소경원에 안장시킵니다. 


세자가 죽었으니 다음 세자는 당연히 세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 후임으로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올립니다.

그리고 인조는 세자빈 강씨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친명배금이라는 나라의 정책을 잘못 선택하여 나라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백성들을 참혹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조선의 희망이었던 소현세자와 가족들까지 무참히 죽인 인조의 행동이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개화는 일찍 되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도 편안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소현세자처럼 혜안을 지닌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국가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을 띠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피가 나오므로, 검은 멱목(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소현세자 죽은 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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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는 1809년 8월 9일 순조임금과 순원왕후 김씨의 장자로 태어난 효명세자 이영

4세의 나이에 이미 세자에 책봉이 되어 세자 수업을 받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세도정치란 세상을 도로써 다스리는 올바른 정치를 의미하는데,

조선 후기에는 외척들에 의하여 권력을 독점하던 정치형태로 변질되었습니다.

세도정치는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조만영의 딸이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어 헌종을 낳자 풍양조씨가 득세하였으며,

다시 철종시대에는 김문근 딸이 왕비가 되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효명세자빈은 나중에 신정왕후가 되어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둘째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신정왕후의 아들로 입적시켜 고종의 정통성이 효명세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지요. 그리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며 효명세자의 뜻에 맞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이런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는 문란하고, 왕권은 미약하여 민란까지 일어나 조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습니다. 

특히 북쪽에서는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홍경래는 평안도 출신의 과거시험 차별,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몸소 겪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난을 일으켰는데 실패로 돌아갑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김조순 일파가 정권을 잡아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를 때였습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던 순조는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순조의 뜻대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며 인사권까지 이양받아 명실상부한 왕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효명세자는 당시 권력의 핵심기구였던 비변사를 장악하고,

규장각까지 장악하여 세도정치를 척결하고자 노력합니다.

일사분란하고 시원스런 일처리로 신하들은 훌륭한 성군의 자질을 가진 세자가 나타났다고 칭송하였습니다.

전국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또한 과감하게 척결하였습니다.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양식의 상언이나 임금 행차시 징이나 꽹과리로 왕에게 읍소하던 격쟁을

적극 활용하여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세자가 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예악입니다. 

세종대왕 때부터 중시했던 예악을 장려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유교의 근본인 예악으로 덕망있는 군주의 존재를 알리고, 세도정치를 타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자료가 많이 없어져 제대로 된 예악을 행하지 못하자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장악원을 중심으로 효를 명분으로 한 예악을 중시합니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도 나오는 최초의 궁중 독무 춘앵전을 비롯하여 25종의 궁중무용과 이에 맞는 악장과 가사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또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직접 지어 신하들에게 읽게 했던 것이 효명세자의 예악이었습니다.

즉 예악을 통해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효명세자의 이러한 노력으로 왕권은 안정되고 민생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 5월 대리청정을 시작한 3년여만에 22살의 한창 나이에 각혈 후에 갑자기 죽고 맙니다.

각혈 후에 죽어서 폐결핵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한창 나이에 죽은 것을 반대파들이 독살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효명세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다스렸다면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고 백성들의 삶은 보다 안정되어 나아가 구한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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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등에 7개의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는 의미로 안응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커가면서 무술에 열중하여 사격을 잘했습니다. 

그렇지만 교육과 민족계몽운동에 주로 힘을 쏟았습니다.

1909년초 안중근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합니다.

그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마디를 끊으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찍은 손도장에 네 번째 손가락이 짧게 나타납니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 활동 반경을 넓힙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군을 이끌며 관군에 쫓기는 김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조마리아, 동생들과 친척들까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집안 정보는 현재 별로 없는 편입니다.

독립군 활동을 하며 일본을 포로로 잡으면 다시 놔주고, 놔준 일본인이 다시 독립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사람들은 안중근으로부터 떠나갑니다.

그러던 차에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온다는 소식에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은 거사를 계획합니다.

거사를 함께 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 전 정류장에서 대기하지만 실패하고

하얼빈역에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코레아 우레"를 외치다가 담담하게 붙잡혀 갑니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고 맙니다.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은 카톨릭 세례명인 토마스를 한자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그는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다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은 고해성사를 요청했으나

교구장에게 거절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 고해 성사를 받아들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안중근에게 2011년 천주교는 살인을 했지만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또 한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장한 아들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이후 그의 장남은 일제에 의해 독살을 당합니다.

일본은 대중 기만술책으로 차남 안중생에게 일본에 공개 사죄하도록 합니다.

김구는 일본에 공개사죄하는 안준생을 죽일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일제의 압박에 의해서 꾸며진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순국하면 조선 땅에 묻어 달라는 안중근이었지만 현재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유해는 반드시 찾아 우리나라 땅에 묻어주어야 할 우리들의 당면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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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출신인 묘청이 1135년 일으킨 사건이 서경천도 운동입니다.

일명 묘청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1126년 이자겸은 경원이씨 가문으로 왕실과 혼인하며 약 80여년간 부귀영화를 누려왔습니다.

그러니 왕의 측근들과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척준경에게 제거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 경주 김씨 세력과 같은 문벌 귀족들이 정치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지방 출신의 새로운 관료들에 의해 특정 가문의 권력 장악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서경 출신의 승려였던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같은 신진 관료들은 당시 고려왕인 인종에게

고려왕이 황제 칭호 사용, 금국 정벌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개경은 지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의 북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하는데, 개경의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금나라와 형제 관계를 맺고 북진정책을 중단하였기에 금국 정벌을 주장한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우리 역사의 일대의 사건이라고 하며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솔깃한 인종은 서경으로 천도를 하고자 하였으며 서경에 대화궁이란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경의 기존 권력층들은 서경 천도 운동을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인종은 서경 천도를 없던 일로 하였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묘청 일파는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 이름을 천견충의군이라고 하며 난을 일으킵니다. 1년여 동안 난을 일으켰지만 개경파인 김부식에 의해 묘청의 난은 진압됩니다.

묘청의 난은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었으며, 왕권이 약화되고, 결국 무신의 난까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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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불교사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가 발달하였습니다.



<태조 왕건>

 - 불교 장려 정책을 썼으며, 개경에 많은 절을 건립하였습니다.

 - 훈요 10조에서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잘 지킬 수 있도록 당부했습니다.

 

<광종>

 -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승과도 실시하였습니다.

 - 국사, 왕사를 두어 국왕과 왕실 사람들이 불교적 신앙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의천>

 - 의천의 천을 생각하니 천태종을 창시했다고 외울 수 있습니다.

 - 화엄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정리하고 선종을 통합하여 교, 선의 대립을 없애려 했습니다.

 -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습니다.

 -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지눌>

 -지눌의 ㅈ을 생각하니 조계종을 창시했다고 외울 수 있습니다.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정혜쌍수 주장 : 참선과 교학을 동등하게 수행하고,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자.

 -돈오점수 주장: <내가 곧 부처>라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꾸준히 수행할 것을 강조


<보우>

 -교단을 통합하여 불교계의 폐단을 정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교단과 정치적 상황이 얽혀 지속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천태종>

-문벌 귀족이 판을 치던 시기에 융성하였습니다.

-의천이 창시하였습니다.

-천태종은 교종계열이므로 교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니 교관겸수를 중시했다고 외우면 됩니다.

-왕실과 문벌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중심이 된 사찰은 국청사입니다.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자. 라고 주장합니다.


<조계종>

 -무신집권기에 융성하였습니다. 무인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지눌이 창시하였습니다.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중시하였습니다.

 -중심이 되던 사찰은 수선사(송광사)입니다.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교종을 통합하자. 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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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불교를 중시한 국가이므로 불교와 관련된 탑과 불상들이 제작되었습니다.

그중 나무로 만든 탑은 현재 남아있지 않즈민 석탑과 불상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1. 고구려 불상과 탑

-불상: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강인함이 느껴지는 불상)

-탑: 주로 나무로 만든 목탑이므로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탑은 없다고 합니다.


2. 백제의 불상과 탑

-불상: 서산 마애여래 삼존불상(백제의 미소라고 불립니다.)

-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 형식으로 쌓은 것입니다.

    *호류사 5층 목탑은 정림사지 오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백제 장인이 건너가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


3. 신라의 불상과 탑

-불상: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부드러운 미소가 특징)

-탑: 분황사 석탑(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음-모전석탑), 황룡사 9층 목탑(몽고 침입으로 소실)

   *모전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합니다. 모전 석탑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탑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모전 석탑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통일 신라의 불상과 탑

 -불상: 석굴암 본존불

 -탑: 2층 기단의 3층 석탑이 유행하였음, 석가탑, 다보탑, 감은사지 3층 석탑 등


 송악 출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합니다. 고려는 발해가 망하자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고,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고, 견훤도 왕건에게 귀순하였습니다. 남은 것은 견훤의 아들 신검이 다스리는 후백제였습니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검이 양검 용검 두 동생과 함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립니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왕건을 찾아가 자신의 목숨을 위탁하였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세운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견훤도 참 딱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나 예전의 적이었던 왕건에게 목숨을 위탁하고, 또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했으니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간 936년 후백제를 멸하고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이때 왕건은 다른 사람의 협박에 못이겨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고 신검을 살려둡니다. 그러자 견훤은 이소식을 듣고 울화병이 생깁니다. 이 울화병이 발전하여 등창으로 번져 삶을 마감하였다고 하니 견훤으로서는 원통한 삶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태조 왕건은 918년부터 945년까지 왕위에 있으면서 여러 정책을 추진합니다.

첫째, 민생 안정 정책입니다. 백성들의 삶이 평안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생각에 지나친 세금 징수를 금지하고 빈민 구제기관인 흑창을 설치하였습니다. 흑창은 고구려 을파소가 건의하여 실시한 진대법과 비슷합니다. 어려운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철에 갚도록 한 빈민 구제 정책이었습니다.

둘째, 호족 통합 정책입니다.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결혼 정책, 관직과 토지, 성을 하사하거나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결혼 정책은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하여 지방의 호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지방 호족의 사위가 왕건이니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방 유력 호족 중 딸이 없는 사람에게는 왕씨 성을 하사하거나 관직과 토지를 하사하여 호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심관제도는 신라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은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그 지방의 유력 인사를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되 반역이 발생하면 사심관에게까지 죄를 물어 지방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제도입니다. 기인제도는 지방의 자제들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여 그 출신지에 대한 일을 맡아보거나 자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은 자제가 서울에 가 있으니 지방에서 함부로 반란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기인제도에서 서울로 올라간 자제는 일종의 볼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북진정책입니다.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하여 고려라고 나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발해 유민을 수용하여 만주에 대한 정보도 얻고, 고구려 영토 회복을 위해 서경(평양)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왕래를 꺼려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만주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곳을 장악한 거란족과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또 여진족을 정벌하여 고려 초기 영토를 청천강에서 영흥만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저술하였으며,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훈요 10조>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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