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스아누스-콜로세움을 세우다>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 언어는 이탈리아어, 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3배, 종교는 90%이상이 카톨릭을 믿는 나라입니다. 로마에는 찬란했던 과거 문화유산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중 콜로세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콜로세움에 도착하여 딱 바라본 순간 느낌은 도대체 그 옛날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기중기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없던 시절 오로지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저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군의 대명사 5대 네로황제는 반란군에게 쫓기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요. 그 다음 황제들은 1년 사이에 3명의 황제가 바뀌는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원로원의 추대를 받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9번째 새황제로 등극합니다. 새 황제는 황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평범한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출신 성분으로는 도저히 왕제에 오를 수 없었으나 그의 성실함과 인덕으로 황제에 추대되었던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출신성분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이전 황제였던 네로와 차별화가 필요했습니다. 또 새로운 황제의 과제는 내전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계획은 콜로세움을 세워 경제적 일자리를 창출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계획하여 실천하였습니다. 콜로세움의 건축장소로는 네로 황제의 궁전자리가 낙점되었습니다. 네로 개인만의 궁전이었던 곳을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물을 짓겠다는 것이었지요.

 건축방식도 대단한 혁명입니다. 그건 바로 아치 형태의 건축양식과 벽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방식이었습니다. 아치 형태는 건축재를 적게 들이고 무게를 줄여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습니다. 먼저 양쪽 기둥에 돌을 쌓고 목재로 아치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돌을 올립니다. 그런 다음 목재를 빼면 온전한 아치 형태의 건축물이 되는데요. 이렇게 하면 돌의 무게를 분산시켜 튼튼한 시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치만으로는 높은 건축물을 튼튼하게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석회, 물, 화산재를 혼합하여 시멘트 대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혼합하면 모든 돌들을 강하게 접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자갈과 모래를 혼합하여 콘크리트 처럼 사용하여 건물을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테라코타 벽돌을 사용하였다. 테라코타 벽돌을 쌓아 튼튼한 석조 건축물을 만든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전 황제의 국고 낭비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 콜로세움을 건설하는데 쓰인 그 엄청난 재정을 어디에서 마련했을까요? 콜로세움의 벽돌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으로 새 원형경기장을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콜로세움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유대함락을 추진하다가 황제로 등극했는데요. 그 자리를 자신의 아들 티투스가 대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서기 70년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당시 티투스의 귀국길에는 수레가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수레에 실린 수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 건설비로 충당되었고 노예들은 현장 노동자로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스파이사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거의 지어질 무렵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 티투스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콜로세움을 완공시킵니다. 

서기 80년 개장하여 100일간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입장권을 받아 입장권에 쓰여진 출입구 번호에 따라 출입하여 신속한 출입이 가능하였습니다. 축제의 하일라이트는 검투사들의 무대였습니다. 노예들의 검투가 있었고 또 신분에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검투사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검투사들을 만나 보려고 돈까지 주었다고 합니다. 

 또 콜로세움에 물을 받아 나우마키아라는 해전을 연습하는 모의 전투도 실시하였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을것입니다.  또 다른 볼거리는 맹수들과 경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함락하고 그곳에서 들여온 사자, 표범, 곰 등과 인간과의 시합인 것이지요.

 콜로세움은 단순한 오락시설일뿐만 아니라 황제가 관중들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얻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세월의 흐름속에 파손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데요. 그래서 콜로세움은 아직 한창 보수중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이 된다면 나우마키아도 재현해보고 모의 칼로 검투사 시합을 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늘 관광지에는 사람들이 붐비지만 겨울에 가면 사람들이 여름에 비해 적습니다. 콜로세움에 가셔서 관중석에 앉아 고대 로마인들의 함성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마지막 왕조 무굴제국

무굴제국의 기원은 몽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굴이라는 말이 몽골지방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이란 페르시아러입니다. 티무르제국이 망한 후 티무르 제국의 부활을 꿈꾼 티무르 제국의 후손이었던 바부르가 북부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나라를 세웁니다.

무굴제국에는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만 왕권이 강력했던 왕 아크바르 왕, 아우랑제브 왕, 그리고 타지마할 묘를 만든 샤 자한 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크바르 황제(악바르 황제)>

제가 학교 다닐때에는 세계사 선생님께서 악바르 대제라고 말씀하셨으며 교과서에도 악바르 대제라고 씌여져 있던 것 같습니다. 둘다 같은 말입니다. 아크바르나 악바르나 둘다 발음이 세서 혹시 이 왕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또는 악하게 다스려서 이런 이름이 붙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만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는 관용적인 정책으로 순하고 착한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크바르 대제 때에 무굴제국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무굴제국의 영토도 많이 확장시킨 왕입니다.

아크바르 대제가 나라를 다스리던 인도는 토착신앙인 힌두교가 있었습니다.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하는 종교입니다. 무굴제국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제국인데 힌두교도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아크바르 대제는 힌두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달래고 어루만져주고 인정해주는 관용정책을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용정책으로는 기존 힌두교도들에게는 지즈야라는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아크바르 대제는 지즈야 세금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렇게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적당히 섞어서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자 노력했던 왕입니다. 비이슬람교도 끌어안고 무굴제국을 진정한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훌륭한 왕이라서 대제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왕입니다.


<샤 자한 왕>

부인과의 로맨스도 있었지만 말년이 비참했던 샤 자한 왕. 왕위가 뭔지 아비와 자식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라는 것을 샤 자한 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뭄타즈 마할입니다. 샤 자한은 평소 뭄타즈 마할은 완벽한 여인이라고 하며 왕비를 사랑합니다. 둘 사이는 원래 결혼하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샤 자한의 정적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른 부인들과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만 뭄타즈 마할과는 너무 좋은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14명이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샤 자한. 너무나 큰 상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위해 묘당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인을 위한 무덤 타지마할 입니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상당한 양의 국고를 쏟아부어 국고가 바닥나게 됩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타지마할 건설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 건설을 중지했다면 지금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볼 수 없었겠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인도 건축물의 상징입니다. 태양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하얀색의 대리석은 각각 다른 빛깔로 변하기 때문에 너무나 장관입니다. 

입구에는 수로가 있으며 정원은 좌우로 잘 대칭되어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일출이나 일몰 때 야무나 강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꼭 봐야 할 타지마할 여행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입장료는 1,000루피로 인도 여행지 중 비싼 입장료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돈으로 환산하면 약 16,500원 정도 들어갑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늘 북적북적거리는 타지마할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장소입니다.

 웅장함, 아늑함, 아담함, 약간의 소박함마저 느낄 수 있는 타지마할. 꼭 가봐야 할 여행지입니다.


 타지마할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일명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아그라성이 있습니다.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붉은 사암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샤 자한이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유폐되어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이곳에서 병약했던 샤 자한이 타지마할 무덤을 바라보며 유폐된 모습을 생각하니 권력 무상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샤 자한 왕을 보면서 공민왕이 생각납니다. 공민왕도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하지요. 샤 자한은 왕비를 위해 타지마할 묘를 조성하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지요. 말년도 비슷합니다. 샤 자한은 자식에게 버림 받아 유폐되어 쓸쓸하게 죽었고, 공민왕은 홍륜과 최만생에게 암살을 당하지요. 하지만 차이점도 있네요. 샤 자한은 14명이나 자식을 두었는데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는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우랑제브(샤 자한의 세번째 아들)

 샤 자한이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병약한 왕을 대신하여 장남이 나라를 다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생들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기회다.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데....'

여러 형제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내는 왕자들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꼭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성계가 병약하여 이방원과 다른 왕자들이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인 결과 세 번째 아들인 아우랑제브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큰 형이었던 다라 시코를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도 아그라성에 유폐시키고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찾아보지도 않은 아주 불효막심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이

  "나는 이제 권력도 없다. 먹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매우 추워서 지내기 어렵구나.! 이렇게 애비를 박대해도 되느냐?"

이렇게 편지를 써도 아우랑제브는 전혀 아버지를 위한 어떠한 효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 비정하지요. 자신의 왕권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는 아버지였기에 아마 비정하게 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우랑제브는 왕위에 오르자 이슬람 중심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는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이슬람교도들에게 폐지시켰던 세금 지즈야를 부활시켰고 이슬람교 이외의 사원이나 학교는 파괴시킵니다. 세금을 부활시킨 것은 타지마할 묘를 건축하면서 엄청난 양의 국고가 낭비되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걷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즉위한 후 한참 후에 지즈야 세금을 걷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이슬람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비이슬람교를 탄압하고자 부활시킨 정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이렇게 이슬람교만을 위한 임금이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비이슬람교도들은 그의 정책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나라의 영토도 남인도까지 넓혀서 무굴제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엄격한 이슬람교적인 생활태도를 강요하고, 비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다 보니 반란의 여지를 만들어 준게 실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우랑제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자기 어머니 묘 타지마할을 조성하면서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으므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자기 무덤에 절대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즉 규모가 작은 무덤을 만들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은 당시의 왕 무덤보다 규모가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도 없으니 어머니 묘와는 다르게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는 그런 무덤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굴제국은 지리멸렬해 졌습니다.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의 반란과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무굴제국은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무굴제국은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교묘히 혼합되어 문화를 발전해 나갔습니다. 인도 전통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새로운 종교인 시크교가 탄생되었으며 건축 양식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요소가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르드어도 사용하였는데 이 언어는 이슬람 국가에서 온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고 튀르크어가 혼합된 언어였다고 합니다. 즉 다른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섞어 발전한 무굴제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조세핀과 에메 뒤비크는 서로 사촌지간입니다. 에메 뒤비크는 1763년 출생하는데 어려서 부모가 죽자, 삼촌에게 맡겨져 조세핀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며 사촌간이지만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에메 뒤비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오스만제국 하렘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하렘이란 황제의 후궁들과 시녀들이 거처하는 금남의 구역이었으며 여자들이 한번 들어오면 하렘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황제의 선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메 뒤비크는 압둘 하미트 1세의 선택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마흐무트 2세였는데 나중에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수도원으로 가다가 팔려와서 일약 오스만제국 황제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조세핀은 물론 아다시피 나폴레옹과 결혼을 하지요.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된 마흐무트 2세. 하지만 즉위 초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에 에메 뒤비크는 사촌동생 조세핀에게 SOS를 칩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부추겨서 오스만제국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무찌릅니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는 아주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지난한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가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즉 영국과 유럽 여러나라 간의 무역을 금지하여 영국을 봉쇄하고 경제적 타격을 가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이 대륙봉쇄령을 효과적으로 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영국은 목재를 러시아에서 대부분을 수입했기에 러시아가 협조만 해 준다면 영국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당시 목재는 생활용품에 필요하지만 전쟁에도 중요한 물품이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여 들인 것입니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대륙봉쇄령에 긍정적이었으나 상인들이나 귀족들의 반대로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혹한, 러시아 원정 시 넘어야 하는 산악지대 등의 이유로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러시아 원정길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강력하게 추진을 합니다. 일단 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전쟁 중이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또 프랑스와 오스만제국과는 친분관계도 있으니 러시아 원정을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습니다.


드디어 나폴레옹은 원정 군대를 꾸려 러시아로 갑니다. 하지만 이때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가 휴전을 맺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가 전개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니 온 군대를 프랑스와의 싸움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전쟁 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대패를 당합니다.(64만명 중 62만명이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전쟁의 책임을 물어 황제에서 쫓겨나 엘바섬에 유배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은 생각합니다. 도대체 오스만제국이 왜 러시아와 휴전협정을 맺었을까?

 '오스만제국이 휴전협정만 맺지 않았어도 승산은 내게 있었는데...'

원인을 찾지 못해 답답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휴전 협정의 이면에는 에메 뒤비크라는 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스만 제국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에메 뒤비크는 나폴레옹이 한 짓에 분노하여 프랑스의 숙적이었던 영국과도 손을 잡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오르자 러시아와도 전쟁 그만하자고 휴전을 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에메 뒤비크가 분노했을까요?

그것은 자신과 어렸을 때 친자매처럼 지냈던 조세핀, 오스만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와준 조세핀. 그런 조세핀을 나폴레옹이 강제 이혼해 버린 것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처절한 복수를 안긴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황녀와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조세핀을 이혼녀의 신세로 전락시킨 나폴레옹을 에메 뒤비크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아!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에메 뒤비크였습니다. 



<트레드밀을 만들다>

1800년대 초 영국에서는 죄를 지으면 교도서에 수감하였는데 형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1. 사형 또는 국외추방

2. 평생 교도소에서 수감되기

교도소의 환경이 워낙 좋지않고 가혹하였기 때문에 사형이나 국외추방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죄수들은 사형 당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평생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교도소는 많은 죄수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죄수들이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난폭한 죄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도관들은 그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술자였던 윌리엄 큐빗에게 부탁을 합니다.

"난폭한 죄수들때문에 미치겠어. 전혀 통제가 안돼.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죄수들이 노동도 하고, 통제가 잘 될 수 있는 어떤 기구를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기구라...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죄수들을 위한 멋진 기구를 만들어주지."

그리하여 그는 바퀴 형태로 돌아가는 기구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계속 밟아야만 돌아가는 기구로 죄수들은 끊임없이 밟아야 되고, 기구가 돌아가면서 물레방아처럼 곡식을 찧을 수 있도록 고안된 기구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죄수들이 노동을 해야 한다는 법을 따를 수 있었고, 말 안듣는 죄수들에게는 공포의 고문기구가 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그냥 밟으면 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애들 장난감처럼 생각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그것을 고문도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매일 6시간씩 트레드밀을 밟다 보면 변화 없는 단순함에 미칠 지경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나마 옆 죄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칸막이를 설치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며 트레드밀을 밟게 하였습니다. 완전 분리된 공간에서 죄수들은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죄수들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 교도관들은 

"어이! 거기 두사람. 그거 타고 싶어! 앙"

이렇게 말하면 죄수들은 금방 공손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수들이 고분고분해지자 영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트레드밀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트레드밀이 죄수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경범죄나 중범죄 모두 똑같은 수감 생활을 시켰고, 교도소에 수감되면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므로 트레드밀도 똑같이 밟아야 했지요. 즉 경범죄나 중범죄자 형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매우 가혹하다는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위하여 1898년 교도소법 제정으로 이 기구의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벌도구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독일에서 스트롱맨쇼를 진행하던 루이스 아틸라. 이 사람은 자신의 하체근력을 키우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운동기구가 뭔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영국에 있었던 형벌도구를 알게 됩니다.

"이게 형벌도구라고....계속 계단을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음. 그러면 하체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겠군."

이렇게 생각한 그는 트레드밀을 운동기구로 탈바꿈시킵니다. 그리하여 개량에 개량을 거쳐 현재 런닝머신이라고 알고 있는 헬스장의 운동기구가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런닝머신은 콩글리쉬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트레드밀(Treadmill)입니다.

Tread - 밟다,  Mill-공장, 곡식을 가는 기구 

즉 밟는 공장, 밟아서 곡식을 가는 기구 란는 뜻이 됩니다.

옛날 고문기구가 현재 헬스장에서 다이어트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운동기구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헬스장에서 하는 것도 좋지만 산에 올라 좋은 공기를 마시며 트래킹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트레드밀 또는 트래킹 해서 뱃살을 빼자....

<얀 네포무크 신부와 왕비의 고해성사>

지난 번 카렐교(카를교)에 대해 포스팅했는데요.
얀 네포무크가 왕비로부터 어떤 고해 성사를 들었기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주었을까요?
체코 프라하 성 앞 블타바 강위에 놓인 카를교...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인데요. 관광객들이 카를교에 와서 꼭 하고 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원을 비는 일입니다. 바로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앞에서 소원을 빕니다. 그래서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 앞 동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이 동판은 얀 네포무크가 카를교 다리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새긴 것인데요. 얀 네포무크가 떨어지기 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마지막 소원을 이 다리에 바치나니 이 다리에 선 자는 모두 소원을 이룰 것이다."

때는 1393년. 얀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고 싶어하는 보헤미아 국왕인 벤첸슬라우스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얀 네포무크 신부, 말하라! 그날 왕비가 신부에게 무슨 고해 성사를 했는지 당장 말하라."
"전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고해성사 내용은 오직 하느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왕비의 고해성사를 말하지 않은 얀 네포무크.

그렇다면 고해성사의 내용은 무엇일까?

왕비는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늘 외로운 왕비.
"외로워 외로워 바람처럼 외로워. 서러워 서러워 ~~~"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전쟁터로 나간 사이 왕비는 루드비크 장군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왕비는 죄책감으로 이런 내용을 얀 네포무크 신부에게 고해성사하고 죄를 사면받고자 합니다.
얀 네포무크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끝까지 비밀로 한다고 왕비에게 약속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누설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왕은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한 시녀가 찾아와 왕비와 장군과의 염문을 발설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시녀가 본 것입니다.
"뭐라! 왕비가 그런 일을...그 장군이 누구냐?"
"전하. 뒷모습만 봐서 어떤 장군인지 잘 모릅니다."
"이런 요망한 것. 만약 거짓이라면 넌 목숨을 잃을 줄 알아라."

왕비의 비밀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며 왕비를 다그치지만 왕비는 전혀 그런일이 없다고 해야 되겠지요.
왕비는 안그랬다고 하고 그러니 시녀를 고문하고 처형합니다.
왕은 그래도 왕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왕비가 고해성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얀 네포무크 신부를 모진 고문을 하며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지 않는 얀 네포무크...
이성을 잃은 왕은 이제 얀 네포무크를 묶어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으로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얀 네포무크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버린 순교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수호자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얀 네포무크가 처형당한 카를교 난간에 십자가 표식을 만들었고 동상을 카를교에 세웠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얀 네포무크 동상앞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얀 네포무크가 다리에서 떨어지기 전에 한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이 다리에 가면 얀 네포무크의 동상 앞에서 동판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저도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고 왔는데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축구 전쟁>

축구 때문에 전쟁한 두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1969년 7월 14일 발발)

1970년에 개최되는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최종전이 열렸다.

월드컵 처녀 출전을 위해 총력전으로 맞붙은 두 나라는

원래부터 영토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이벌 의식이 강한 두 나라가 본선 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1차전-온두라스 승리

개최지: 온두라스

승리국: 온두라스가 1대0으로 승리

경과: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잘 뛰어다니지 못함.

 그 이유는 경기 전날 밤 온두라스 극성팬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묵고있는 호텔에 찾아와

밤새도록 시끄럽게 타악기를 연주하는 등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잠을 잘 수 없었음. 

 다음날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음

사람들은 온두라스의 매너없는 행동을 강하게 비난함.


2차전-엘살바도르 승리

개최지: 엘살바도르

승리국: 엘살바도르가 3대0으로 승리

경과: 경기 전날 밤 엘살바도르 극성팬들이 온두라스 선수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찾아와

쥐를 던지거나 시끄럽게 하여 온두라스 선수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함. 

온두라스가 중계방송하면서 계속 엘살바도르를 비난하자 

엘살바도르 관중들이 온두라스 관중들에게 몰려가

폭력을 행사하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함.

당일 경기: 온두라스 선수들은 제대로 뛰어다니지 못하고 3:0으로 패배함

-경기가 끝난 후 온두라스에 거주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인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함

6월 23일 두 나라는 단교를 선언함


3차전-연장 혈투 끝 엘살바도르 승리

개최지: 멕시코

승리국: 2:2 무승부 후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가 1대0으로 승리

당일 경기:

 - 멕시코 경찰들이 엄청 많이 투입되어 경기장 질서유지 시킴

 -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혈투를 벌임.

 -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승리


축구전쟁 발발

-축구 경기가 끝난 후 양국 간 국민 감정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

-온두라스인들의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 심화. 수십명 목숨 잃음

-분노한 엘살바도르 정부는 7월 14일 전쟁을 선포하여 개시함

-4일동안 벌어진 전쟁이라 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함

-사상자: 17000여만명

해외 여행 시 시중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면세점에서 꼭 구입하는 향수.

향수는 어떻게 발전이 되었나 또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여행 시 산 향수인데 가격이 너무 싸요.

3만원대 향수인데 냄새도 무난해서 저는 3개 구입하고, 집사람은 20만원대 향수 2개 사더라구요.
차에 1개 두고 가끔 뿌리면 차내 향기도 좋아집니다.


중세의 프랑스 귀족들은 목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욕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역시 목욕을 무척 싫어하였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춤 연습을 하여 흠뻑 젖은 땀을 절대 씻지 않았다.

! 냄새...

그러면 어떻게 했느냐?

바로 깨끗한 옷을 갈아 입는 것으로 목욕을 대신했던 것이다.

일국의 왕. 그것도 태양왕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왜 그랬을까?

목욕이 그렇게 귀찮았나?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하인들이 목욕을 다 시켜주지 않았을까?

 

씻지 않은 이유는 왕의 주치의가

목욕을 하는 것은

병균을 몸에 바르는 행동이니 목욕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왕실이 이러하니 일반 국민들도 당연히 목욕을 기피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은 흑사병

도대체 흑사병이 왜 발생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자 의학자들은 병의 원인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어이없게도

목욕을 하면 병균에 잘 감염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인간의 몸은 스펀지 같아서 물을 만나면 스펀지처럼 병균을 잘 흡수한다고 주장하였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수증기는 병균을 옮기는 원인이며

물이 몸에 닿으면 더러운 물질이 몸 안에 들어가서 병에 걸린다고 주장하였다.

 

땀으로 생긴 때는 제2의 피부로 우리 몸을 보호한다고 믿었기에 목욕을 안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유익하다고 말했다.

결국 대중 목욕탕을 폐쇄하고 가정의 목욕탕 또한 없앴다.

 

목욕을 안하니 어떻게 되나?

몹시 심한 악취로 고생했으나 그게 오히려 건강미의 상징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특히 루이14세의 입 냄새는 몇m 떨어진 곳까지 풍기는 엄청난 악취라고 했으니 신하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 목욕은 언제 하는가?

의사들의 지시 하에 치료 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몸이 아플 때 조심히 실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심한 악취로 인해

왕족이나 귀족들은 향수나 화장품을 사용하여 자신의 악취를 중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유럽은 향수 산업이 대대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다.

목욕을 하지 않는 문화가 향수를 발전시키는 문화를 형성시켰다.

향수의 발전은 더더욱 목욕을 기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미국의 호텔들이 호텔에 목욕탕을 만들었다.

미국사람들은 호텔이 투숙하면서 목욕을 즐겼다.

그리고 호텔들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런 성공으로 목욕탕이 있는 호텔이 일류호텔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목욕을 통해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문화가 생겼다.

 

이 문화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목욕이 병을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깨지게 되었다.

 

저는 현재 목욕탕을 10년 정도 다녔습니다.

일반목욕탕이 아닌 온천입니다.

매일 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건성피부증세도 없어지고

특히 고질병인 비염도 사라졌습니다.

겨울이면 티슈를 들고 다니며 코를 풀거나

심한 재채기로 너무 힘들었는데 온천 다닌 이후로 모두 없어졌습니다.

 

매일 온천을 하니 온천물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는데,

지난 번 일반 목욕탕을 갔더니 물의 느낌이 너무 다르더라구요.

역시 온천목욕이 훨씬 제 몸에는 맞는 것 같습니다.

온천 가까운 곳에 살아서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가끔 온천을 찾아 여유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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