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최악의 판단미스 진주만 공습

세계 제 2차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원래 서로 전쟁을 하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시킨 틈을 타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합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만든다." 

라고 주장하며 침략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곳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원유 수송을 차단하고 경제적 제재를 취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과의 우월한 협상을 하기 위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전함 5척이 파괴, 200여대 항공기 파괴, 2,000여명의 사망 등 

전술적, 인적, 물적인 피해를 많이 봅니다.

 진주만을 무력화 시킨 후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무혈입성 하다시피 점령합니다.

 

일본은 일본이 내건 평화협정을 미국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 지역의 지배권을 달라고 요구했지요.

협상은 커녕 많은 피해를 본 미국은 격분하게 되고,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참전을 선언합니다.


이후 산호해 전투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패퇴하고 맙니다.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앞세운 일본 군부는미국에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는데,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최후의 방법으로

인류 최초로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먹입니다.


8월 15일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 국왕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발표를 하며 일본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지 말고, 

서희의 외교담판처럼 미국과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배제한 일본은 너무나 큰 피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지도층의 오판이 일반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준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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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의 선전으로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가 매우 긴밀해졌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병을 파병한 우리나라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경험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은 주한미국을 빼내 베트남전에 파병시키려고 하는 미국의 의도에 박정희 정부는 우리들이 전투병을 파병할테니 주한미군을 빼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병 파병에 따른 우리나라의 경제적 원조를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약 17년전에 한국전쟁을 경험한 국가로 공산주의와 싸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채명신 사령관을 중심으로 용맹스럽게 전투를 하여 베트콩들을 무찔렀습니다.

 공개된 호치민의 명령에는

 "한국군을 만나면 전투를 하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부대를 만나면 무조건 작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군사 장비를 보호하라"

 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또 엄청난 포탄을 쏘고 수많은 전사자를 냈음에도 프랑스, 미국, 월남군이 베트콩 요새 탈환을 실패하였는데, 한국의 해병대는 단 두 시간만에 점령해 버렸다는 이야기는 신화에 가깝습니다. 용맹스러운 해병대 군가가 생각나는군요.(그래서 해병대 캠프를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전술의 차이라고 전해집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즉각 여러 방향에서 사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군들은 뒤로 물러나 포병에게 포 사격을 요청하거나 공중 폭격을 요구합니다. 그런다음 보병이 공격을 해봤자 그때는 이미 베트콩이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베트콩들이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을 해도 한국군은 즉시 반격, 미군은 일보 후퇴하여 포격 요청을 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베트콩들도 섣불리 한국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한국군과 싸우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베트남 주민들은 한국군이 주둔한 곳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하여 한국군 주둔지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옛날 임진왜란 시 이순신 주둔지가 안전하다고 하여 백성들이 몰려들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베트콩을 무찌르는 것과 함께 베트남 주민들을 위한 대민지원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특히 맹호부대가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 댐을 건설해서 베트남의 2모작 농사를 3모작 농사가 가능하도록 대민지원을 하였습니다.

  17년전 한국은 공산군과 싸우며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그 정신을 이어서 베트남에서도 공산주의와 열심히 싸운 대한민국 국군들에 대해 전 세계 언론들은 믿을 수 없는 전과라고 하며 대서특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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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여성들은 그 더운 나라에서 얼굴을 가리거나 머리를 가리는 두건을 써야 합니다. 

그게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나 여름에 얼마나 땀이 많이 찰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슬람 여성들은 히잡을 쓰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이슬람 코란에서는 여성들이 남성을 유혹할 만한 신체부위를 드러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슬람 국가마다 약간씩 다르게 여성들의 옷차림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럼 이슬람 사람들이 착용하는 두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부르카

-이건 진짜 인천공항에서 부르카를 한 여성을 봤는데 정말 덥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꼬마아이는 무서워서 뒷걸음질 치기도 하더라구요.

-머리부터 발목까지 모두 덮는 이슬람 의상인데 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눈을 앞을 봐야 하니까 이 부분만 모기장 같은 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종교적 신념으로 봐야 되겠지만 그래도 답답한 복장인 것 어쩔 수 없네요.


2. 니캅

-부르카처럼 온 몸을 완전히 가립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카는 눈 주위를 모기장 같은 망사로 가리지만 니캅은 그렇지 않고 눈만 노출시킵니다.


3. 차도르(아바야)

-얼굴을 제외한 모든 전신을 가리는 이슬람식 복장입니다.

-주로 검은색인데 양장을 입은 후 차도르를 걸칩니다.

-즉 얼굴만 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가립니다.


4. 히잡

-머리와 목 등을 가리기 위해 씁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나마 부르카, 니캅, 차도르보다 좀더 편리할 것 같습니다.

-아랍어로 가리다의 뜻입니다.

-코란에 언급되었으므로 역사가 오래된 전통 이슬람 복장입니다.


5. 터번

-남자가 착용하던 머리 둘레에 감는 천


6. 카피아


-케피에, 카피에라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남자들이 천을 머리에 쓰고 아갈이라는 테 모양의 머리띠를 눌러 씁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남자 왕족들이 뉴스에 나올 때 많이 볼수 있는 복장 형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착용하면 벌금을 부과합니다.

부르카 금지법이 2011년부터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는 이슬람 여성들을 위한 전신 수영복인데

이것도 프랑스 몇몇 해수욕장에서는 부르키니 착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또 사람과 만나는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부르카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아마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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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지역,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최초로 문명을 발전 시킨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입니다. 이들이 발달시킨 문명이 바로 수메르 문명입니다. 수메르 문명은 이집트 문명보다 조금 앞선 문명이라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시기는 모릅니다.

기원전 5천년 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수렵 채집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밀 농사법을 터득하여 조금씩 정착생활을 하면서 기원전 4천년경 부터는 이 지역에 도시들이 출현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이상기후가 많아 수메르인들은 종교에 의지하게 됩니다. 수메르 종교에 나오는 신 중 아누나키를 묘사한 조각이 있습니다.

아누나키 전설을 이렇습니다. 원래 지구에는 인간들이 없었는데 아누나키라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비행체를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누나키를 묘사한 조각을 보면 우주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이 지역에 왜 내려왔을까요? 그건 금을 채굴하러 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직접 금을 채굴하려면 귀찮고 힘들어서 그걸 대신할 것을 그게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수메르 문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수도시설이나 바퀴 등도 수메르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특히 인간의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한 하수도 시설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수레바퀴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 시설을 잘 정비하였습니다.

수메르인들이 집은 점토로 만든 벽돌집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석재가 별로 없었으므로 벽돌집을 지었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어 수로시설까지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쐐기 모양의 문자로 설형문자입니다. 쐐기문자를 점토판에 기록하여 현재 해독이 되어 수메르 문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유물들입니다.

 여기서 쐐기란 나무나 철을 비스듬하게 만들어서 문틈에 괴어 놓는 빗면처럼 생긴 물건입니다. 또는 물건 사이를 벌릴 때 쓰이는 납작하고 뾰족한 도구를 말합니다. 쐐기문자라고 하는 이유는 글자의 모양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쐐기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우르남무 법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법이 존재하는 문명적인 사회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는 함무라비법전보다 약 250~300년 앞선 법입니다. 우르남무 법전은 점토판에 수십가지 법전을 새겨 놓았습니다. 

 하루를 시와 분으로 나눈 최초의 문명으로 60진법이 발달하였습니다. 수메르 최고의 신인 안의 고유숫자였기에 60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수학을 발달시켜 수메르 문명은 과학과 천문학까지도 발달하여 건축물에도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건축물이 유명한 지구라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피라미드보다 조금 작지만 정교하고, 수학적 원리가 잘 적용된 건축물입니다. 종교적 건축물로 현재 약 25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내부는 진흙으로 채우고 외부는 점토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만들었습니다.


수메르에는 유명한 인물 두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인물이 길가메쉬입니다. 그는 우르크 왕이었고 힘도 장사였으나 백성들의 평판은 좋지 않았습니다. 우르크 백성들이 길가메쉬에 대한 불만이 크자 여신이 엔키두라는 또 다른 장사를 만들어 냅니다. 엔키두는 뿔달린 괴물입니다. 엔키두는 길가메쉬에게 도전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둘이 싸움을 끝내고 화해하여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둘은 세상 모험을 떠납니다.

이 모험을 통해 그들은 악당들을 혼내주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모험 중에 엔키두가 죽습니다. 길가메쉬는 매우 슬퍼하며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납니다. 여기저기 모험하다가 불로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이란 노인을 만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삼 백살 정도의 노인으로 신들이 이 땅에 거대한 홍수를 있을것이라고 예언하여 광주리를 만들어 가족들과 홍수를 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자기 집 앞 호수 밑에 불로초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길가메쉬는 어렵사리 불로초를 구해 나왔으나 그걸 뱀이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것도 이브의 선악과에 나오는 뱀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길가메쉬는 불로초를 뱀에게 빼앗기고 슬프게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다음은 사르곤이란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아카드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사제(여자 제사장)이었는데 원래 여사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사르곤을 갈대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한 정원사에게 발견되어 그가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왕의 눈에 띄어 왕의 시종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전과를 거둔 후 사르곤이 키시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당시 최강의 도시였던 우르크와 전쟁하여 승리를 합니다. 이후 계속적인 정복활동으로 수메르 지역을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상으로 수메르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해독하여 알게 된 이야기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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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도자 중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모택동(마오쩌둥).

그가 벌인 작전 중 참새 박멸 작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958년부터 60년까지 중국은 최악의 흉년으로 4천여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흉년이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그건 바로 참새들 때문이었습니다.

주석에 오른 모택동은 식량 증산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현지 시찰도 하였습니다.

1958년 현지 시찰하던 모택동은 수확기에 접어든 벼를 참새들이 쪼아 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참새들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겠구나!'

 모택동은 참새들이 어떻게 하면 벼를 쪼아 먹지 않을까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참새를 박멸하라!>

베이징 시민들은 참새 박멸을 위해 독극물을 쓰고, 포수들도 동원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참새들이 앉으려 하면 꽹과리를 치며 벼에 앉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무에 앉아 쉬려고 하는 참새들도 꽹과리 소리에 하늘을 날아다녀야만 했습니다. 

결국 하늘을 날다 지친 참새들은 지쳐 땅으로 떨어지고, 독극물에 죽거나 포수들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게 참새 박멸 작전으로 약 2억마리의 참새를 없앴습니다.

모택동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올해 풍년 농사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년은 개뿔~~ 가을에 추수를 해보니 오히려 엄청나게 쌀 생산량이 줄었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 한 해동안 굶주림에 약 200만명이 죽고, 

그 다음 해에도 쌀 생산량이 적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참새를 박멸하니 그동안 참새들이 잡아 먹었던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해충들이 벼를 갉아먹어 대흉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참새 박멸 작전을 중단하고

은밀하게 소련으로부터 참새 20여만 마리를 긴급 지원받았습니다.

하지만 2억 마리나 죽였는데 20여만 마리의 참새로는 벼농사를 풍작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택동은 이 작전의 실패로 권력 퇴진을 압박 받아 2선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중국 인민 수 백만명이 목숨을 잃는 대인재를 초래하였습니다.

지도자의 판단 착오가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역사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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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와 대항해 시대

후추는 계피(시나몬), 정향과 더불어 세계 제 3대 향신료 중의 하나로 인도 말라바가 원산지입니다. 

설렁탕에 파와 후추를 넣어 먹으면 후추의 맵고 쌉쌀한 맛이 설렁탕의 맛을 더 좋게 만들어 줍니다. 

선사시대 때부터 사용해 온 후추는 실물화폐 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600여년전만해도 후추는 금값에 맞먹어 블랙 골드라고 불리웠습니다.

특히 인도 후추는 천국의 알갱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귀했습니다.

유럽 상인들이 왜 후추를 소중히 여겼을까요?

그건 유럽 사람들이 잘 먹는 육류와 관련이 깊습니다.

당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고기를 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때 후추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고, 육류 특히 양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주며,

매콤한 맛을 내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이 후추 맛에 열광하였습니다.

후추 소비는 많은데 공급이 딸리니 후추 가격은 원산지의 몇 십배나 되었습니다.

육로를 통해 인도에서 한번 후추를 가져오면 부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무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이제는 유럽 상인들이 지중해와 육로를 통해서는 후추를 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개척한 것이 해상 교통로입니다. 

이슬람 세력에 막혀 있으니 해상 항로 개척을 위해 열을 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항로 개척을 위해 뛰어든 나라는 포르투갈입니다.

자원도 변변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은 바다에 승부를 걸은 것입니다.

1487년 3척의 배로 항해를 시작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1488년 아프리카 최남단에 도착합니다. 

이후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케이프타운)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합니다.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인도 후추를 가지고 와 수십 배의 이득을 봅니다.

인도 항로 개척은 그동안 지중해 무역 중심에서 대서양으로 무역의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후추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자 동아시아로 계속 진출한 포르투갈은 

일본까지 표류해 가서 조총 제조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자극을 받은 이웃나라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가 항해하는데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콜럼버스는 항해를 계속하여 지금의 산살바도르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이 곳이 죽을 때까지 인도로 잘못 알아 서인도제도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마젤란도 항해를 하다가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전투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선원들이 항해를 성공하여 세계일주를 성공하였습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마젤란 일행은 세계 일주하면서 향신료를 배에 가득 실고 와

세계 일주하는데 쓰인 비용을 제하고도 막대한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항해에 성공하여 물건을 싣고 오기만 하면 엄청난 이익을 얻는 대박산업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신대륙을 향해 배를 띄우고 신대륙의 향신료나 원료를 얻어 오고자 하였습니다. 

대항해 시대로 세계 역사를 바꾼 이 모든 것이 블랙골드, 후추 쟁탈전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원나라 상인들이 후추를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서는 호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호박, 호주머니(호랑), 호도 등 오랑캐 호가 붙은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호초는 나중에 후추라고 불리워졌으며 

조선 중기 일본 사신이 연회 중 후추를 뿌리자 여인들이 

그것을 줍느라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징비록에 적혀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설렁탕에 후추와 파를 넣어 한 그릇 뚝딱 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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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인류 역사를 보면 풍년이 계속 되어 인구가 늘어난다 싶으면

갑자기 자연재해 등으로 흉년이 들어 인구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기도 하였습니다.

즉 식량 생산 증가보다 인구가 더 많아져서 굶주림에 배를 곯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감자는 

유럽의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밀가루를 빵으로 만들어 먹으면 과정도 복잡하고 번거롭지만

감자는 그냥 씻어서 삶거나 구워 먹으면 배가 부르니 간편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를 식용으로 대량 재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주식이 되었습니다

감자로 굶주림을 해결하게 되자 17세기 초 200만명의 인구는 

18세기 중엽에는 800만명으로 네 배나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작물이 주식이 되면 위험성도 크게 마련이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곰팡이에 취약한 감자역병이 돌자 감자가 썩어 수확량이 급감하게 됩니다.

감자역병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자 유독 아일랜드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거의 모든 땅에 감자를 심어 가꾸던 아일랜드 땅에서 감자가 다 죽게 되니 먹을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흉작으로 1845년부터 1850년까지 감자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기근의 원인이 아일랜드인의 게으름이라고 하며 외면해 버립니다.

이 기간 동안에만 약 110만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고,

감자 대기근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도 약 10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도 아일랜드 이민 후손이고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3등칸에 대부분 아일랜드인이 승선하여 피해도 가장 컸습니다.

아일랜드를 800년이나 식민지배한 영국, 대기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외면한 영국....

지금도 아일랜드인은 영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마치 한국과 일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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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끼리 땅을 사고 판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나라끼리 땅을 사고 판다는 이야기는 잘 못들어 봤지요? 하지만 나라끼리 땅을 판 이야기는 알래스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860년대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펼치면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남하가 달가울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투르크를 지원하여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합니다. 나아가 영국은 더 이상 러시아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알래스카를 노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이 영국을 견제하면서 알래스카를 노렸습니다. 그때 미국의 대통령은 앤드류 존슨, 국무장관은 윌리엄 슈어드였습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전쟁에서 패하여 재정이 부족하고,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은 자꾸 알래스카에 눈독을 들이니 러시아는 돈이 없어서 팔긴 팔아야 하는데 영국에게는 넘겨 주기 싫었습니다. 그때 미국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은 빅토리아여왕 시대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이 죽어서 슬픔에 잠겨 국제 정치에 등한시 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국 몰래 러시아와 협상한 미국은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회에서 1표 차이로 가까스로 통과되어 알래스카를 매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래스카를 매입한 후 미국민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였습니다. 그런 쓸모없는 땅을 샀다고 대통령과 국무장관에 대해 맹비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슈어드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고 앤드류 존슨 대통령도 탄핵안이 상정되었으나 1표 차이로 가까스로 대통령 직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끝난 것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그런데 30년 후 알래스카를 산 것이 황금을 헐값에 사들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알래스카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유전이 개발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 땅을 치며 후회를 했겠지요.

또 알래스카는 관광업이 매우 활성화 되어 관광수업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몇 개 남지 않은 생태계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게는 기회의 땅, 러시아에게는 참담한 후회의 땅이 되었던 알래스카. 지금은 미국 국민의 애착을 갖는 땅이 되었고 당시 대통령 앤드류 존슨과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는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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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720일 닐 암스트롱은 미국의 아폴로 11호를 타고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여 21시간 30분 동안 달에 머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59년 소련의 최초 달 탐사선 루나 1호를 발사한 지 10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습니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갔었던 일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에 의해 샘플 월석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디며 문워크를 했다는 것은 인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류가 달에 착륙하였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고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억했습니다. 소련과 미국 서로 달 탐사를 비롯한 우주 계획을 경쟁하면서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969년의 달 탐사가 미국의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우주 개발의 한획을 그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에 대한 관심도가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집니다. 화성이나 다른 행성을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면서 달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낮아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인류는 1969년 이후로 근 50년 가까이나 달에 다시 가지 않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달에 어마어마한 자원이 있다면 아마 달에 가기 위해 세계 각국들은 달에 가보기 위해 엄청난 연구와 노력을 했을 것인데 투자 대비 수입이 별로 없는가 봅니다. 현실적으로도 지구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 달도 왕복하면 무려 76만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달 탐사선에 사람을 태워 보내게 되면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비용과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달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굳이 가고 싶다면 조종사와 승무원 등을 뽑아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50년 전의 지식을 현재에 맞게 재정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최소한 몇 년 또는 십 년 가까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달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자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사람이 직접 달에 가지 않고도 달을 탐사할 수 있는 무인 탐사기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가구야는 18개월동안 달의 궤도에서 관측을 실시하였는데 최초로 고선명 비디오로 촬영하였습니다. 중국의 탐사기 아시아 최초로 달 착륙선인 창어 3호는 2013년 달에 직접 착륙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탐사로봇을 보내면 되기 때문에 유인 달 탐사선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최초 달 착륙 이후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무인 탐사기의 기술력이 매우 향상되어 더욱 소형화되고 선명한 화질로 달의 모습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로마 초기는 왕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에 반발하여 기원전 509년 왕정을 축출하고 귀족적인 공화정이 형성됩니다. 의결기구인 원로원은 300,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어 권력을 여러 명이 나눠 다스립니다. 원로원과 집정관은 모두 귀족으로 구성되어 귀족적 공화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에서 집정관 2명을 선출하고 1년 임기를 마치면 다시 원로원으로 돌아갑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휘두르자 평민들도 스스로 무장을 하여 전쟁에 참여합니다. 이 당시 전쟁은 남의 땅을 빼앗거나 곡물을 약탈하여 자기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민들은 중무장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더 많은 이익과 토지를 얻게 됩니다. 힘을 키운 평민들은 점차적으로 정치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494년 민주적 공화정이 탄생됩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중무장한 평민들이 정치적인 요구를 해도 귀족들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귀족들은 기득권을 내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일으킵니다. 즉 우리 평민들은 더 이상 전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성산에 모여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귀족들 너희들 마음대로 하고 너희들이 알아서 전쟁에 참여하라는 뜻이겠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을 어루만지고자 호민관 제도를 탄생시킵니다. 호민관이란 평민들의 대표를 말합니다. 호민관은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472년에는 평민회가 구성됩니다. 호민관을 선출하고 평민을 위한 입법 활동도 하며 평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원 전 450년에 12표법을 제정합니다. 이 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평민을 법으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평민들을 벌할 때 귀족들 몇 명이 모여서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처리하였지만 이제는 법으로 딱 정해져 있으니 귀족들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문법으로 해 놨으니 그동안 관습법대로 처벌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귀족들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할 수 없는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아직은 귀족들의 힘이 더 센 시기입니다.

 기원 전 367년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됩니다. 이제는 집정관 2명 중에 반드시 1명을 평민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법이었습니다. 평민들의 힘이 점점 세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 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법까지 제정됩니다. 이 법은 평민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원로원 동의 없이 의결하여 실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이 동등해졌다는 의미입니다기원 전 270년 공화정으로 국력을 키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카르타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통일된 이탈리아는 영토 확장과 지중해 해상권에 대한 야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기원전 264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하는데 이를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가 개척한 나라로 고대 페니키아의 식민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르타고를 라틴어로 말하면 포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에니 전쟁의 승자를 로마로 끝납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정복지에서 많은 곡물이나 노예들이 로마로 유입됩니다. 귀족들은 넓어진 토지에 정복지의 노예들을 데려다가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데 이를 라티푼디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그동안 전쟁에 참전하느라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토지 규모도 영세하여 귀족들의 라티푼디움과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귀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대규모로 수확물을 생산하니 먹고 살기 힘들었던 자영농은 토지를 귀족에게 팔아버리고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포에니 전쟁으로 귀족들의 농장을 번성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열심히 싸웠던 자영농은 아이러니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자영농들이 몰락하니 자연적으로 공화정에 위기가 생겨납니다.

 이런 공화정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그라쿠스 형제입니다. 이들은 개혁을 통해 자영농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싼 값에 곡물을 사들여서 저가로 평민들에게 분배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득권층인 귀족들은 찬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두 형제들을 암살하고 맙니다. 또 기원전 73년에는 검투사 노예 계급인 스파르타쿠스가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킵니다. 검투사 경기는 당시 로마인들의 유흥거리였는데 이들이 집단 탈주하여 무기를 들고 배수비오 산을 근거로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 농장의 노예들도 탈출하여 배수비오 산으로 몰려 듭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고 로마는 삼두정치가 실시됩니다.

 1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60년에서 기원전 44년까지인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렇게 세 명이 권력을 독점하며 싸웠고 결국 카이사르가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는 독재권력을 휘두르다가 반대파의 암살을 당합니다. 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43년부터 기원전 31년 까지인데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명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둘이 싸움을 하는데 그게 유명한 악티움 해전입니다.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가 승리합니다. 악티움해전에서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바로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자신은 로마의 제1시민이라고 지칭합니다. 독재를 휘두른 카이사르와 반대 성향이어서 원로원은 흡족해 합니다. 그러는 사이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이 장악하자 원로원에서는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주게 됩니다. 당신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으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까지 부여합니다. 이제는 황제정치 즉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후 약 200년간 평화 시대, 5현제 시대가 도래하여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우는 로마의 평화시대가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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