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 시험은 3년에 한번씩 치러졌는데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한양의 과거 시험장에서 낙담하고 돌아간 지방의 선비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문과의 최종 합격자는 33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팔도의 선비들은 이 과거시험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합격하기 너무나 어려워 다양한 꼼수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남의 답안지에 시험관 눈을 피해 몰래 자기 이름으로 바꿔 쓰기, 뇌물을 써서 시험관을 매수하기, 붓에 숨겨오기, 도포 자락에 예상 답안을 몰래 써 넣기, 밖에서 써준 답안지를 몰래 건네 받아 답안지 완성하기, 신체 일부 기관에 예상 답안을 숨겨 오기 등등 다양한 꼼수가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시험 전에 철저하게 몸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는 사람들간의 거리는 1.8미터를 유지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시험 감독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응시하는 경우는 그 사람을 다른 시험장으로 옮겨 배치하였습니다.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오려내아 따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누구의 글씨인지 시험 채점관이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시험관이 다른 종이에 답안을 옮겨 적은 후 채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걸리면 정도에 따라 3~6년 정도 시험볼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다른 사람 시험지를 보고 쓰다가 걸리면 곤장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문이나 혈통 등 모든 청탁과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시험과 채점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순수한 실력 만으로 인재를 뽑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평균 시험 준비 기간이 20년 정도 걸렸다고 하니 결국 과거 준비에 몰두할 수 있게 해줄 경제력이 필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경제력과 권력이 있는 양반 집안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평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는 있지만 책을 사야 할 돈이나 가정 경제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어 평민들은 과거 시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과 시험에서 소과는 생진과라고도 하며 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시험입니다. 이 소과를 합격해야만 하급 관리로 채용될 수 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대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소과에 합격한 후 대과 시험을 치르는데 초시는 수 만명의 응시자 중 240명을 선발합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240명을 대상으로 복시를 치릅니다. 복시에서는 총 33명을 선발합니다.(무과의 경우는 28명 선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전시가 있습니다. 전시는 합격 불합격을 따지는 것 보다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금님 앞에서 33명이 최종 순위 경쟁을 합니다. 최소 5등 안에 들어야 앞으로 고위 관료로 승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33명 중에서 1등을 하면 장원급제라 하였으며 이후 관직의 승진에 있어 많은 이점이 있었습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쉬운 광해군  (0) 2018.06.03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  (0) 2018.05.31
조선 과거시험의 꼼수들  (0) 2018.05.26
조선의 과거시험 무과에 대하여  (0) 2018.05.26
조선의 형벌 5가지  (0) 2018.05.25
대한민국의 애국가  (0) 2018.05.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