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죽음>

 영조는 효장세자를 10살때 잃은 후 언제 아들이 태어날까 늘 걱정했는데 드디어 42살 때 아들을 얻었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아들이었기에 곧 왕세자로 책봉하고 애지중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조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급기야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극의 생을 마감합니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13일 이른 아침,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갔습니다. 몇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영조를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세자를 폐위하라-

청천벽력같은 임금의 목소리에 대신들은 그저 눈만 껌뻑거립니다. 영조의 분노를 알고 있는 대신들이기에 섣불리 나서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영조는 세자의 폐위를 결단한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입니다.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병으로 죽은 후 얻은 귀한 아들이라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칭해지고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어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735년 영조 11년 1월 25일)을 보면 <혈맥을 다시 잇게 되었으므로 종묘에 뵐 면목이 섰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도세자는 총명함과 영특함을 보이며 차기 임금으로서 타고난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8세에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이 시작된 후 세자의 태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학문보다는 그림그리기나 무인적 성격이 드러났으며 먹는 것도 많이 먹어 몸도 비대해졌습니다. 일찌기 조현명이 사도세자를 보고 효종을 닮은 세자라고 하며 경하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현명의 예언대로 사도세자는 활을 잘 다루었고, 힘도 장사였습니다. 무인적 기질은 책을 쓰는 활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학문보다는 무술을 좋아하는 사도세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영조는 사도세자를 자주 꾸짖게 되고 이런 상황이 싫은 사도세자는 영조를 멀리하게 됩니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세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영조는 여러가지 지적을 하며 사도세자를 불신하게 됩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보면 <세자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정하지 못해 내게 번거롭게 물으니 대리 청정을 시킨 보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사도세자의 정무적 능력을 불신하게 됩니다. 부족한 세자를 향한 영조의 질책은 신하들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질책이 계속되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갔습니다. 아버지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위에 올랐으며, 평생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영조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세자는 늘 부족한 아들이었습니다. 영조가 원하던 모습과 정 반대로 가는 세자를 보며 꾸지람과 냉대가 심해졌습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부터 병이 생겨 본성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영조가 매번 엄히 꾸짖으니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과 두려워 하는 마음이 생겨 병이 더해갔습니다. 세자의 병을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계증, 천둥과 벼락 소리를 무서워하는 뇌벽증, 옷차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의대증, 그외 헛것을 보거나 살인이나 자살시도 등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습니다. 폐사자반교에 따르면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불에 달궈 지지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가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나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적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많은 수의 궁녀, 기생, 여승을 가까이 하고 세자의 방탕한 생활이 지속되자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뿐 세자의 죽음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세자의 생모였던 영빈 이씨는 아들의 죄상을 영조에게 직접 고합니다. 그건 바로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반역죄>였습니다. 영빈이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왕)을 묻고자 했으며 저(영빈 이씨)도 몇 번이나 죽이려 했습니다. 비록 제 몸이야 괜찮지만 지금 임금의 위험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어찌 감히 제가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대처분을 하소서!

 이에 분노한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며 폐세자반교를 공표합니다. 세자가 자결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42살에 귀하여 얻은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합니다. 당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지는 사도세자, 하지만 그의 죽음에 따른 또 다른 진실이 반역죄였습니다. 그 후 영조는 사망한 아들을 생각하고 애도한다 또는 사도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요절하다 라는 의미로 사도세자라고 시호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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